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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을 이야기하면 빼놓을 수 없는 가람이 있으니 바로 동화사(桐花寺)다. 팔공산 자락에는 동화사 외에도 파계사, 은해사, 부인사, 갓바위 등 불교 사찰과 유적이 모여있다. 흡사 경주 남산이 그렇듯 팔공산도 불교와 관련된 유적이 많다.

동화사는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고찰이다. 유가사라는 이름으로 신라 21대 소지왕 15년(493년)에 극달화상에 의해 세워진 절이다. 그 후 42대 흥덕왕(832년) 심지왕사가 중창하면서 지금의 이름인 동화사로 개칭했다.

동화(桐花)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오동나무 꽃과 관련이 있다. 심지왕사가 유가사를 중창하면서 주변에 핀 오동나무와 그 꽃을 보고 이름을 동화사로 불렀다고 한다. 동화사의 옛이름인 유가사(瑜伽寺)는 대구의 남쪽 비슬산에 있어 익숙하다. '유가'는 아름다운 절이라는 뜻이다.

동화사는 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엔 고승인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다시 중창된다. 또 고려 무인집권기 때(1202년) 신라 부흥을 꾀한 경주별초군 민란에도 가담하였다. 이때 부인사와 동화사의 승려들이 참가했었다.

그후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시기인 조선시대에도 별다른 억압 없이 경상도 지방의 대표 사찰로 인정받으며 가람의 여러 건물이 중창되었다. 임진왜란 중이었던 선조 때에는 사명대사가 왜군을 물리치기 위한 승군사령부로도 사용했었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팔공산성을 축조했으며, 구미 금오산성, 경기도의 남한산성을 축조하기도 했다.

현재 동화사에 남아있는 건물들 대부분은 숙종과 영조 때 건립되거나 중창된 건물들이다. 신라고찰이긴 하지만 당시의 모습은 거의 없고 조선후기에 중창, 중수, 창건으로 지금의 가람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신라시대의 흔적은 바위에 새겨진 석불좌상이 전부다. 나머지 석탑과 당간지주, 석조부도군 등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지나면서 만들어졌거나 세워진 것들이다.


동화사를 들어가는 입구는 두 곳인데, 팔공산 위락시설이 모여있는 서쪽방향에서 들어오는 곳과 동화천의 발원지이며 원래 입구인 남쪽에서 들어오는 입구로 나눠져 있다. 만일 차를 가지고 간다면 팔공산 위락시설 쪽 금강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나라 사찰의 구조를 미리 공부하고 가면 좀 더 쉽게 이해가 되는데, 절의 입구에는 대부분 일주문이 있다. 두 개의 기둥으로 된 일주문을 지나야 비로소 도량이 시작되는 것이다.


위락시설 입구에 선 커다란 금강문과 매표소가 원래 동화사의 입구는 아니다. 우리나라 전통 사찰엔 일주문도 없이 금강문을, 그것도 차를 타고 통과할 수 있는 곳은 없다.

동화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장권을 구입해야 하는데, 어른 2,500원, 노인은 무료이며, 주차비 2,000원을 받는다. 주차는 위락시설 쪽에서 들어가 연못을 지나면 바로 나타난다. 웬만큼 차량이 몰려도 수용할 정도의 넉넉한 공간은 갖추어져 있다.

주차장 쪽엔 간이 매점과 관광안내소가 있고, 1주차장 대나무밭 뒤로 비로전이 있다. 비로전은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이다.
 

주차장에서 얕은 언덕을 넘으면 큰 나무들과 마당이 보이는 가람의 중심이 나타난다. (사)천왕문인 옹호문이 보인다. 옹호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만들어져 있다.

천왕문은 사찰과 불법(佛法)을 수호하고 잡귀를 내쫓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일주문을 통과하여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 들어가는 중간쯤에 위치해 있으며, 이 문을 통과하면 잡귀가 떨어지고 깨끗한 마음으로 도량으로 들어갈 수 있다.


사천왕은 동서남북의 각 방향을 지키는 수호왕들인데 칼을 들고 있는 동쪽의 지국천왕, 북쪽을 지키며 비파를 들고 있는 다문천왕, 남쪽을 지키며 용과 여의주를 들고 있는 증창천왕, 삼지창과 보탑을 들고 있으며 북쪽을 지키는 광목천왕이다. 



옹호문을 지나면 마당이 나온다. 마당 정면에서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큰 누각이 하나 서 있는데, '봉서루'라는 누각이다. 봉황이 깃든 누각이라는 뜻으로 동화사의 위치가 봉황이 알을 품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봉서루를 통과하여 대웅전으로 향하기 전에 봉황의 꼬리를 의미하는 큰 자연석과 함께 알 모양의 돌 셋을 만날 수 있다. 봉황알이라고 하는데, 이 봉황알을 만지면 소원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한다.


봉서루를 지나면 사찰의 가장 중심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 대웅전이 보인다. 동화사 대웅전은 정면 세 칸과 팔작지붕으로 된 전형적인 한국 전통의 대웅전 모습을 갖추고 있다.

다른 사찰과 다르게 대웅전 축대 아래 양쪽에 괘불대와 노주가 놓여져 있다. 괘불대란 신자들이 많이 모여 대웅전의 부처님을 직접 알현할 수 없을 때 괘불대에 부처님의 그림을 걸던 기둥을 말한다.


두 쌍의 괘불 사이에 나무를 고정시켜 국기 게양대처럼 만들고 이 게양대 사이에 부처님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고정시켜 마당 멀리 있는 신자들도 잘 볼 수 있도록 만드는 시설이다.

괘불에 걸리는 그림은 탱화와 달리 길고 크게 만든 대형 걸개용 그림이다. 부처님뿐만 아니라 용도에 따라 다른 그림들이 걸린다고 한다.


사진은 괘불대이다. 그리 굵지 않으면서 긴 나무를 괘불대로 사용했고 두 개의 괘불대 양쪽 사이에 줄로 묶어 괘불 그림을 걸었다고 한다.

노주(露柱)는 그 사용용도가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사찰 석물이다. 기둥에 받침대 형태로 만들어져 있는데 그 위에 뭔가를 놓았거나 그대로 어떤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정확하게 용도를 알지 못한다. 괘불과 달리 대웅전 양쪽에 설치되어 있다.

대웅전 주변에는 단체 관람 온 사람들에게 문화해설사들이 설명을 하고 있다. 예전에 보기 힘든 이런 모습은 우리의 전통 문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에는 부처님을 중심으로 왼쪽에 아미타불, 오른쪽엔 약사여래불이 봉안되어 있다. 부처님 불상의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데, 이 수인은 깨달음을 얻기 직전 마왕을 항복시키는 순간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모습이다. 천정에는 용과 봉황이 장식되어 있다.


대웅전 모서리 기둥에 사용된 굽은 나무기둥이다. 대부분의 기둥은 곧은 나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굽은 나무기둥을 사용하여 자연의 미를 그대로 살리기도 한다. 분명 곧은 나무들이 많았을 텐데 굽은 나무를 기둥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대웅전 기둥에 붙은 기둥글씨를 아래쪽에 정자로 쓰고 이를 해석한 판이 달려있다. 동화사가 약사신앙의 대표적인 불사여서 신도들이 많이 찾는다는 이유로 설법을 쉽게 풀이한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 뒤쪽으로는 산신각과 조사전, 칠성각이 위치해 있다. 산신각은 우리의 토속신앙이 사찰로 들어온 대표적인 상징이다.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은 산에는 산신이 있다고 믿었으며, 대부분의 사찰이 산에 있으므로 산신을 위한 건물을 별도로 지었다. 모든 산신각은 조선중기 이후에 건립되었다. 그 이전엔 산신각을 따로 만들지는 않았다고 한다.


산신각에는 탱화가 걸려 있는데 호랑이와 함께 산신이 묘사되어 있어서 다른 건물들과 구분된다. 호랑이가 함께 그려져 있는 탱화가 있다면 산신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조사전은 동화사를 거쳐간 고승들을 모시는 공간이다. 극달화상, 보조국사, 사명대사 등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조사전은 신라 말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것으로 유명한 고승들이 많을수록 영정이 많고 오래된 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화사 칠성각은 새로 지어졌다. 옛 건물을 헐고 다시 지어서 아직 단청도 바르지 않은 상태이다. 칠성각은 원래 인간의 수명장수를 관장하는 북두칠성신(칠성탱)을 봉안한 건물이다.


대웅전의 뒤쪽 동쪽방향에는 석가모니불과 그의 일대기를 8개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를 봉안하고 있는 영산전이 있다. 영산전은 팔상전으로도 불리는데, 동화사 영산전은 석가의 제자인 나한을 봉안하는 나한전(응진전)도 함께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석조 석가삼존불을 중심으로 16 나한상이 좌우로 열전해 있다.

봉안된 나한들은 모두 다른 표정을 하고 있는데, 쳐다보아서 눈이 마주치는 나한과 닮은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 결혼한 부인들이 자주 찾는 건물이기도 하다.

영산각 뒤엔 나반존자라는 나한을 따로 모시는 전각이 하나 있다. 천태각이라고 불리는데 나반존자는 중국의 천태산에서 깨달음을 얻은 나한이다.


그 외의 건물들은 대부분 스님들이 수행을 하는 곳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설법전이나 법화당 등의 강당 기능을 하는 곳에는 행사 때마다 신도들을 대상으로 설법을 전파하는 용도로 활용하고 있다.


봉서루 오른쪽엔 종루가 설치되어 있는데, 불전사물(佛展四物)이 모두 있었다. 불전사물은 범종, 법고, 목어, 운판 이렇게 네 가지 소리 나는 물건들을 말한다. 통일범종루라고 이름 붙은 이곳은 통일을 염원하는 통일대불과 관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설법전 등 사찰 주요 건물들이 있는 곳을 살펴본 다음 통일대불이 있는 곳으로 가보았다. 원래 순서대로라면 남쪽의 일주문을 지나 통일대불을 지나 대웅전으로 올라오는 것이 순서지만 차량 때문에 반대로 움직이게 되었다.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해탈교라는 작은 다리를 만난다. 아래로는 동화천의 발원이 되는 개울이 있다. 산속에 있는 사찰 대부분은 해탈교나 열반교 같은 다리가 있다.

해탈교, 열반교같은 석조 다리에는 많은 뜻이 있다. 이 다리를 지남으로서 속세를 떠나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며 모든 근심과 걱정을 버리고 피안의 세계로 들어감을 상징한다.



해탈교 중간에 사람들이 서서 연못처럼 생긴 개울물에 뭔가를 던지고 있다. 동전이었다. 개울 중간에 놓여져 있는 돌그릇 같은 곳에 동전을 던지고 있었다. 복을 비는 행위라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다.


해탈교를 지나면 왼쪽으로 당간지주가 보인다. 당간은 절의 경계를 표시하기도 하고 절의 종파나 행사 등을 알리는 기를 꽂는 역할을 했다. 당간지주는 당간을 세우기 위한 지주석이다. 지주석 사이에 나무를 세워 깃발을 높이 올리는 것이다.

당간은 삼국시대부터 유래되었다고 하며 대부분의 거대한 당간들은 고려 때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조선시대부터 당간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전해져서 지금 대부분 남아 있는 당간지주들은 고려시대 이전의 것들이라고 한다. 당간지주나 그 흔적들은 예전에 그곳이 절터였음을 알리는 자료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동화사 당간지주는 '이곳부터 동화사의 가람이다'라는 표시로 생각하면 된다. 당간지주 옆으로 인악대사비각과 석조부도가 서 있다. 일반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금당선원과 본당으로 가는 갈림길에 당간지주와 함께 위치해 있는 인악대사비는 조선시대 동화사주지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고승인 인악대사를 기리는 비석이다.


이 비석은 다른 비석들과 다른 특이한 점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비석의 귀부(비석을 받치는 하단부)가 거북이가 아닌 봉황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동화사와 봉황의 관계 때문에 특이하게도 봉황을 귀부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비석은 1808년 경상감사 김희순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동화천의 발원지답게 팔공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작은 개울을 이루고 있어서 동화사는 피서지로도 유명하다. 한여름 사찰의 입구 계곡에는 많은 피서객들이 가져온 자리를 깔고 더위를 피하곤 한다.


조용한 분위기에 시원한 계곡물은 더위를 식히기에는 그만이다. 올해는 비가 자주 오지 않은 탓에 수량이 풍부하지는 못하지만 큰 나무아래 그늘에 그래도 조금씩 흐르는 개울은 피서지 역할로는 충분하다.


절이 있는 곳에 소원을 비는 많은 이들의 정성이 있다. 이곳 동화사 계곡에도 절탑같이 돌로 만든 소박한 돌탑들이 많이 보인다. 높이 높이 쌓인 돌들이 하늘에 닿아 그 소원들 모두가 성취되었으면 좋겠다.


동화사를 방문하게 되면 반드시 찾아가는 곳이 있다. 바로 통일약사여래불이다. 1992년 11월에 완공되어 당시 세계 최대의 석조불상이었던 통일약사여래불은 동화사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는 불교문화재다.


통일대전을 가기 바로 전에 일주문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중간쯤에 108계단이 놓여져 있어서 동화사 본전을 거치지 않고도 바로 통일대전과 약사여래불로 갈 수 있는 계단이 있다.

이 계단이 108계단이라고 하지만 세어보니 108개에 훨씬 못 미쳤다. 불교에 있어서 108의 의미는 알고 있지만, 108계단이라고 했으면 개수가 108개로 만들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면서 고뇌를 한가지씩 버릴 수 있도록 말이다.


통일약사여래대불 앞에는 국내 최대 규모인 17m 석탑 2기가 놓여져 있으며 그 뒤쪽으로 거대한 석등이 각각 1기씩 설치되어 있다. 약사여래대불 안에는 미얀마정부로부터 기증받은 부처님 진신사리 2과가 모셔져 있다.

 
통일대불 뒤쪽으로는 호법무사들이 조각되어 있다. 부처의 세계를 지키는 호법무사들은 저마다 나름대로 무섭고 위엄 있는 표정으로 부처와 중생을 보호하고 있다.

약사불이 각종 질병과 재난으로부터 중생을 지켜주는 부처이며, 아미타불이 중생을 극락 세계로 인도하는 부처라는 것을 안다면 불교에 대해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다. 통일대불은 약사불이다.


통일약사여래대불의 왼손엔 약단지가 들려져 있다. 오른손은 시무외수인을 하고 있다. 통일약사여래대불은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이루는데 뜻을 모으며 가족과 모든 사람들의 안전과 건강을 기원하는 뜻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원래 팔공산 일대의 사찰들이 건강을 지키고 재난으로부터 중생을 구제해 달라는 약사여래신앙이 왕성한 지역이었다. 개인의 건강을 지키고 전쟁과 같은 큰 재난을 피하고 대형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기원하는 약사여래불을 모시는 절이 많았던 곳이다.


서쪽입구에서 시작된 동화사 관람은 통일대불에서 마무리된다. 팔공산의 대표사찰이며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이며, 경북 5대 본산인 동화사는 건강과 안녕을 비는 신도들이 많이 찾는 약사신앙의 중심지이다.

또한 여름 더위도 피하면서 고찰을 관람하기 위해 대구와 인근 경북지역 사람들이 많이 찾는 사찰이기도 하다. 팔공산 일대에 만들어진 위락지구에 면해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 사찰의 구조에 관련된 글
2008/06/15 - 자연과 함께한 가람, 김천 황악산 직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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