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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서울'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서라벌'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상식이다. '서라벌'이 '셔블'로 바뀌었고, 다시 '서울'이 되었다는 것인데, 서울은 수도(중앙정부가 위치한 곳)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서라벌하면 신라를 떠올리는데, 서라벌은 신라 수도의 이름이었으며, 지금의 경주를 그때는 그렇게 불렀다. 서야벌, 서벌, 계림 등으로도 불렸지만 가장 대표적으로 서라벌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진다. 그럼 언제부터 신라는 신라(新羅)라는 나라 이름을 썼을까?


'신라(新羅)'라는 국호는 503년인 제22대 지증왕 4년에 만들어졌다.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에서 따온 이름으로 새 신(新)자와 그물 라(羅)를 대표로 하여 국호를 정했다. '덕업이 날로 새로워지며, 사방을 망라한다'라는 뜻의 약자가 바로 '신라'다.

지붕없는 신라와 불교 박물관 경주를 제일 빠르게 이해하는 방법은 바로 국립경주박물관을 찾는 일이다. 요금을 받을 때에도 입장료는 저렴했지만, 정부시책에 의해 2008년 5월 1일부터 지금까지 무료로 개방되고 있다.

입구에서 바라본 고고관 전경


국립경주박물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수학여행의 추억일 가능성이 높지만, 경주를 이해하고 신라를 이해하는데는 이만한 곳도 없다. 역사박물관이 원래 유물을 전시하는 것이 주 임무이긴 하지만 그 시대의 문화와 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의 역사도 긴 편이다. 1910년에 이미 경주에선 신라의 문화유적을 보호하기 위한 모임을 결성했고, 3년 뒤에 '경주고적보존회'라는 이름으로 신라문화제 보존활동을 했다. 

당시 경주시 동부동에 옛 객사 건물을 전시관으로 사용했다가 1929년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이 되었다. 해방되던 1945년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이 되었다. 그리고 현재의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은 1975년 지어진 것이다.

본관(고고관) 건물에 이어 1985년 안압지(월지) 발굴을 계기로 출토 유물을 보관하는 안압지관을 개관했고, 2002년엔 미술관을 신축하였다.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본관 옆에 지어졌던 고분관은 특별전시관으로 전환되었다.
성덕대왕신종 종각 특별전시관

국립경주박물관은 고고관(옛 본관)과 안압지관, 미술관, 특별전시관 등의 4개 건물과 성덕대왕신종이 있는 종각, 석탑, 불상 등 석조문화재가 전시된 야외전시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린이박물관은 특별전시관 지하에 있다.

고고관은 선사시대부터 원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유물을 전시한 4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고관은 국립경주박물관의 가장 중심인 전시관으로 주로 경주지역의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해 놓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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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관의 선사 원삼국실은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를 아루르는 선사시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때는 문자가 없던 시대여서 유물을 통해 시대상을 역으로 밝혀낸 연구 내용들이 곳곳에 유물과 함께 설명되어 있다.

빗살무늬토기, 돌도끼, 그물추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들 유물들은 김천이나 경주, 울산 등 경상도 지역에서 발굴된 것들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 땅에 정착해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석기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정교한 도구들로 어떻게 그 때 당시에도 저런 물건을 만들어 생활에 사용했는지 놀랍기만 하다. 기계와 기술이 부족했던 시대에 만들어진 유물들은 의외로 잘 만들어져 있다.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청동이 등장하면서 한반도의 문화도 급변하게 된다. 주로 사냥과 전쟁을 위해 검(칼)과 창, 화살촉 등에 청동이 사용되었다. 이때도 석기는 여전히 인기있는 도구로 더욱 정교해지고 다양하게 발전한다.

이들 대부분의 유물들 역시 오래된 고분에서 출토된 것이다. 옛 무덤들은 우리의 역사의 냉동고와도 같다. 그 시대의 문화나 생활상을 그대로 품고 있기 때문이다.

청동에 이어 철의 생산은 무기와 농기구의 대량생산으로 이어지면서 농경사회와 함께 국가체제를 이루는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경제와 외교, 군사라는 것을 기초로 하여 국가라는 체제를 만들었고, 이 때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가 구축되던 삼한시대였다.

고고관의 선사 원삼국실은 신라를 설명하기 앞서 그 근원을 살펴보는 중요한 전시관이다. 우리 조상들이 석기에 이어 청동기, 철기를 생산하면서 오늘날의 국가라는 체제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군사력의 기본이 되는 무기와 경제력을 키우는 농기구, 신분을 구분하는 장신구 등은 모두 돌과 청동, 철로 만들어졌으며, 이때부터 사람들은 짐승들을 상대하는 것이 아닌 동일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직적으로 싸우고 빼앗으며, 때로는 지키는데 목숨을 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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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를 황금의 나라라고 부르는 것은 금관을 비롯한 금제 장신구들 덕분이다. 금관총의 발굴로 알려지기 시작한 금의 나라 신라의 모습은 당시가 얼마나 화려한 문화를 가진 시기인지를 추측하게 한다.

금을 추출하고 정교한 장식을 통해 화려한 금관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은 단순히 왕권의 상징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었다. 출토된 유물을 통해 금속세공기술이 상당히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분에서 출토된 유리잔들


금을 귀하게 여기고 왕권 혹은 부의 상징으로 여겼던 문화는 북방 유목민족에 의해 유입된 것이었다. 또한 출토된 유물에서 유리잔 등은 페르시아와 로마 계통의 유리로서 서역과도 활발한 무역을 하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왕릉이 대거 모여있던 대릉원의 거대 무덤들에서 금관을 비롯하여 금허리띠, 금관모, 새날개모양관식 등이 발굴되면서 신라는 황금을 잘 다루는 기술을 가진 국가였음이 밝혀졌다.

적석목관분의 단면도


특히 이러한 유물들을 무덤에 함께 껴뭍었던 것은 당시의 왕권에 대한 상징적인 표시다. 금관뿐만 아니라 목걸이, 귀걸이 등에서 금과 은, 옥 등의 다양한 부장품은 당시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대부분의 중요한 전시품들은 고분발굴에 의해 출토된 것들이다. 이들은 일제시대와 그 이후에 발굴에 의해 빛을 본 것들로 당시의 무덤 문화에 대한 정보가 함께 한다면 빠르게 이해가 된다.

박물관에서도 가깝고 시내중심부에서도 가까운 대릉원은 유물들의 보고다. 특히 고분 내부가 일반에 공개되어 있는 천마총과 중요한 유물이 쏟아져 나온 황남대총은 반드시 둘러볼만한 곳이다. 박물관과 함께 이곳을 둘러본다면 유익하다. 

토우달린 목항아리


출토된 유물 중에는 흥미로운 것들도 있는데, 미추왕릉지구에서 발굴된 국보 195호 토우달린 목항아리는 관람객들의 눈길을 끈다. 일반 항아리와는 달리 토우로 장식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동물이 등장하는 사냥모습, 가야금 연주, 춤추는 모습, 성행위 모습 등은 다산, 풍요 등의 샤머니즘을 표현한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유물이다.

발굴된 다양한 토우들


토우는 당시 의복과 일상 생활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신라시대 복식을 배울 수 있고, 당시 사람들의 생생한 모습과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남자와 여자, 지위의 높고 낮음, 가축 등을 표현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토우의 남녀 차이에 대한 성표현은 순박함을 넘어 너무나 직설적이다. 현대인들이 생각하기에 과해보이지만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덕목이었는지 모른다. 인구가 중요했던 상시 상황을 생각하면 다산(多産)은 중요한 국가 정책이었을 것이다.

말탄무사모양토기


말탄무사모양토기는 아주 유명하다. 토기이긴 하지만 결국 액체를 마실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잔인데, 당시 무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이들 토기의 대다수는 모두 고분에서 발굴된 것으로 모두 귀한 물품에 해당한다. 사후세계를 믿던 당시의 관습으로 보면 번영, 다산을 상징하는 각종 토기, 각종 무기와 무사를 위한 물품 등은 가장 중요한 유물들이었다.

외부 세력에 의한 무덤 훼손을 고려하여 목곽분에 돌무덤을 만들고 다시 이를 거대한 흙무덤으로 조성하여 만들었다. 고분들의 구조는 시간이 흘러 권력자에 의해 조상의 무덤이 파헤쳐지지 않는 이상 도굴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도록 고려된 것이었다.

무열왕릉에 있는 고분군


경주의 고분들은 무덤이라는 특성으로 사체를 훼손하거나 영면을 방해하는 것은 큰 죄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로 와도 큰 어려움 없이 보존될 수 있었다.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던 것은 대부분 일제시대 이후로 중앙정부의 무관심과 문화보존에 대한 가치를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한 세력들에 의해 방치되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문화재 수탈을 통해 일본문화의 우월성을 날조하기 위한 행동으로 공공연한 도굴을 자행했고, 해방후에는 문화재의 우수성과 경제적 가치를 느낀 도굴범들에 의해 고분들은 약탈의 수난을 겪었다.

그들에게 도굴된 유물들은 단순히 돈으로 바꾸거나 자신들의 역사를 왜곡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되었지만, 우리에겐 우리의 뿌리를 흔들고 역사를 망각하게 만드는 중요한 범죄에 해당하는 행위들이다.

박물관 뒷뜰에서 본 고고관 전경

경주박물관의 고고관은 경주와 경상도 지역의 중요한 고분 출토 유물들이 전시된 공간이다. 교과서에서 봐왔던 낯익은 유물들이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들이 숨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예전과 달리 전시관내 유물 사진촬영은 단서가 달려있긴 하지만 자유로웠다. 유물을 보호하기 위해 플래시를 터뜨리는 것은 금지하고 있으며, 어두운 전시실 환경에서 촬영하기 위해 삼각대를 이용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삼각대는 다른 관람자들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 카메라 촬영은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런 사실을 인지못하는 관람객들은 곳곳에서 플래시를 터뜨리고 있어서 아쉬웠다.

경주를 제일 빠르게 이해할 수 있는 곳. 국립경주박물관 고고관은 경주여행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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