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경주', 잔잔한 풍경과 사랑 이야기를 담은 영화

킬크 2014. 8. 17. 17:39

난 '경주'라는 곳을 정말 좋아한다. 가까이 살 때 경주는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어서 큰 마음 먹지 않고도 언제든 찾곤 했었다. 그 곳에 가면 늘 마음이 푸근했었고, 쫓김이 없었다. 마치 거기가 고향인듯 편안했다.

 

다시 수도권으로 이사 오면서 1년 가까이 가보지 못했지만, 언제든 맘 먹으면 달려가던 아름다운 곳이 경주였다.

 

 

박해일, 신민아 주연의 '경주'라는 영화를 봤다. 사실 다른 어떤 것보다 '경주'라는 친밀한 지명 덕분에 본 영화였다. 영화 포스터는 박해일과 신민아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 장면과 함께 '7년을 기다린 로맨틱 시간여행'이라는 부제가 걸려있다. (그러나 주인공은 대사를 통해 처음엔 8년 전이었다고 한다)

 

2시간 25분이라는 비교적 긴 러닝타임과 중국교포 3세 감독이 만든 영화라는 점, 많은 까메오가 출연(하물며 현역 정치인까지...)한다는 점은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 알게 되었다. 영화가 끝났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읽어야 했다. 알듯 모를 듯한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가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와 관련된 감독의 인터뷰를 읽었다. 감독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시나리오로, 처음 경주를 방문한 뒤 다시 방문하게 되었을 때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이다.

 

 

감독이 말하는 경주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특별한 공간이다. 경주 시내에 널리 퍼져있는 고분군을 두고 한 말이다. 특히 시내 중심부의 황남리 고분군 주변은 주택들이 밀집해 있다. 집 앞을 나서면 커다란 고분이 바로 앞에 나타나는 그런 곳이 바로 경주다.

 

한국인이지만 이방인의 삶을 살아온 감독의 눈에 비친 경주의 모습은 신선하기도 했지만 놀라운 곳이었다. 무덤을 곁에 두고 촌락이 구성되어 있으며, 심지어 무덤은 삶의 휴식처이며 풍경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주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으로 비쳐질만하다.

 

 

영화 '경주'

 

주인공 최현(박해일)은 중국 북경대에서 동북아정치학을 연구하는 교수로, 가까운 선배의 조문차 중국 베이징에서 대구를 방문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대구공항을 나서는 장면으로 출발하는 이 영화는 영화 곳곳에 감독의 '장치'들이 나타난다.

 

장례식장을 가기 위해 찾았던 택시 승강장에서 담배와 관련된 에피소드로 어린 아이 모녀를 만난다. 나중에 이 모녀는 경주 보문호에서 다시 만나는 인연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 뒤에 이 모녀의 비보도 듣게 된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선배와 죽은 망자는 이 이야기의 주요 무대인 경주 '아리솔' 찻집의 인연을 가진 이들이다. 주인공이 갑작스럽게 경주를 찾게 된 이유도 바로 이들의 과거 추억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경주에 도착한 최현은 추억이 있는 아리솔을 찾아가기 위해 자전거를 빌린다. 경주시외버스터미널이 나오고 관광안내소가 나온다. 이곳 근처에 자전거 대여점들이 있다. 경주를 자주 가본 사람들에게는 친숙한 장소.

 

터미널에서 자전거로 그리 멀지 않은 황남리 고분군 근처. 아리솔은 그 근처에 있다. 잠시 쉬면서 학창시절 친한 후배였던 김여정(윤진서)에게 연락을 해서 경주로 와달라고 부탁한다. 옛 생각을 하면서 들어선 아리솔. 추억의 그 방으로 갔다. 그러나 그때 벽에 붙어 있던 춘화는 없다. 찻집 주인 공윤희(신민아)는 춘화를 찾는 최현의 모습을 보고 그가 변태라는 오해를 한다.

 

영화는 아리솔을 배경으로 최현과 공윤희의 대화와 행동을 보여준다. 조용한 배경과 롱테이크로 그들의 행동을 무심히 비춘다. 약속시간이 다 되어 최현은 신경주역에 도착하는 여정을 만나러 간다.

 

나가기 전 아리솔과 윤희를 스마트폰 카메라에 담지만 카메라엔 아리솔 배경만 저장된다. 그리고 이어진 씬에서 여정을 찍는 모습에서는 정상적으로 저장된다. 무슨 의미일까? 혹시 아리솔 주인 윤희는 죽은 사람?

 

여정을 만나 해장국 점심식사를 하면서 이 둘의 사이는 드러난다. 학창시절 이들에겐 사연이 있었다. 순탄치 못한 결혼생활. 의처증 남편을 둔 여정은 힘들어 한다. 뜬금없는 점집 할아버지 씬은 나중에 다른 논란거리가 된다.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이 안 가도록 만든 장치인 것 같다.

 

여정을 환송한 뒤 장면. 끊었다던 담배를 꺼내 피운다. 한 개피가 아닌 두 개피를 한꺼번에. 다시 보문호 장면에선 대구공항에서 봤던 꼬마 숙녀 모녀와 재회한다. 다시 뜬금없는 태극권 장면. 그리고 다시 아리솔로 발길을 옮긴다.

 

아리솔에는 일본인 관광객이 있다. 최현을 본 일본인 관광객은 배우냐고 물어본다. 윤희는 장난으로 그렇다고 답하며, 최현이 관광객과 사진을 찍게 한다. 사실 최현은 일본어도 한다. 나중 전화받는 씬에서 확인된다. 최현은 한국어, 중국어, 일어가 가능한 인물이다. 이 부분에서 두 사람은 어느 정도 호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갑자기 나타난 장례식장 미망인(형수)은 최현에게 죽은 창희가 살해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은 것이라는 묻지도 않은 설명을 한다. 실제 장면이 아닌 상상으로 보여진다. 미망인이 대구 장례식장에서 최현을 만나러 아리솔로 올 수 있는 상황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언가 메시지를 던지려는 느낌이 강하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아리솔로 찾아온 윤희의 친구 다인(신소율). 이들은 자신들의 저녁 약속에 최현을 동참시킨다. 저녁 술자리에 모인 사람은 북한학 연구 박교수, 플로리스트 강선생. 박교수와 강선생은 까메오. 강선생은 유명한 류승완 감독이며, 박교수는 백현진으로 언더그라운드 가수 겸 화가다. 그는 영화 OST '사랑'이라는 노래도 직접 불렀다. 류감독은 존재감 제로에 가깝다. 연기의 어색함으로 정말 류승완이 맞는지 의심할 정도.

 

뒤늦게 합류한 영민(김태훈)은 윤희에게 최현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한다. 영민은 윤희를 짝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다인은 영민을 짝사랑한다. 영민역의 김태훈은 배우 김태우의 동생이다. 아주 많이 닮았다.

 

술집씬에는 또 다른 두 명의 까메오가 등장하는데, 옆 방에서 술 마시고 있는 일행 중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나우필름 대표 이준동(이창동 감독 동생)이며, 그를 말리는 사람은 국회의원인 송호창이다. 이들이 왜 이 장면에서 나오는 것인지는 짐작하기도 어렵다.

 

술집씬에 이어진 노래방 장면. 윤희의 노래에 최현은 나와서 혼자만의 블루스(어쩌면 태극권을 구사하는지도...)를 춘다.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서로에게 계속해서 호감이 상승한다는 것을 묘사한 장면같다.

 

박교수와 강선생, 다인을 보낸 윤희와 최현, 영민은 걷는다. 도심 고분군을 지나다 봉분 위로 올라가 앉는다. 일반인이라면 하지 않는 행동이다. 경주에서 고분은 무덤이 아닌 생활의 일부라는 것을 이야기 하려 한 것 같다.

 

잠시 카메라는 이들의 모습과 경주의 밤경치를 비춘다. 이어 관리인이 나타나 이들을 제지한다. 봉분에서 내려오라는 호통을 치는 고분 관리인, 그도 까메오다. 더 테러 라이브 영화제작자이자 씨네2000 대표인 이춘연.

 

갈림길에서 영민을 보낸 윤희와 최현은 윤희의 집으로 향한다. 두 사람은 어색해 하면서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눈다. 대화 속에서 윤희의 남편이 우울증으로 자살한 사실이 드러난다. 봉작의 그림 속에 있는 싯구 '사람들 흩어진 후에 초승달이 뜨고 하늘은 물처럼 맑다'

 

갑자기 최현의 귀를 만지고 싶다는 윤희. 남편과 비슷한 귀모양, 하지만 느낌은 다르다. 야릇한 공기가 흐른다. 그때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한 영민이 갑자기 윤희의 집으로 찾아온다. 영민은 돌아가고, 윤희는 자신의 침실에서, 최현은 거실 소파에서 잠을 잔다. 두 사람의 속마음을 보여주는 작은 행동들... 문을 살짝 열어두고 침실에 드는 윤희와 방문 앞에서 망설이다가 촛불을 끄는 퍼포먼스를 하는 최현.

 

새벽에 일어난 최현. 베이징에 있는 부인으로부터의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식사를 하러 나선다. 식사 중 걸려온 여정으로부터의 전화. 그녀의 남편이 자신을 쫓아 경주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급하게 식당을 나서고...

 

여정이 잠시 점을 봤던 그 자리에 들어서자 할아버지 대신 젊은 여성이 나타났다. 어떻게 된 것일까?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분이라고 한다. 또 다시 거리로 나서는 최현. 어제 골목길에서 봤던 폭주 오토바이를 탄 3명이 그 앞에서 갑자기 사고를 내고 쓰러진다. 죽은 것일까? 물 흐르던 강가로 달려가 보지만 돌다리는 여전하지만 천은 말라 있다. 뭐가 바뀐 것일까?

 

윤희는 최현이 가리키던 춘화 자리를 계속 보다가 벽지를 찢는다. 그 장면은 7년 전으로 돌아가는 장치다. 생전의 창희형과 장례식장에서 만난 춘원형이 함께 한 찻집 자리. 찻집 주인은 윤희!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백현진의 '사랑'이 흐른다.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난 갑작스럽게 만난 결말에 힘이 풀렸다. 어떤 사람은 이런 허무한 결말에 화를 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영화 평점과 반응이 극과 극을 이루는 이유이기도 하다.

 

'경주'를 본 많은 사람들은 '그래서 뭐?'라는 반응이고, 또 많은 사람들은 영화의 분위기와 여운에 좋은 반응을 보였다. 난 처음 30여분 동안 부정적이었다가 점점 영화가 진행될수록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흔히 첫 인상은 홍상수식 영화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여행과 찌질한 남자 주인공(최현은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술자리, 남녀관계, 밋밋한 줄거리 등등 영화 '경주'는 홍상수 영화와 많이 닮아 있다. 큰 차이점이라면 박해일이 분한 최현이라는 인물은 홍상수의 남자들과 달리 찌질하진 않다. 다만, 까칠하고 직설적이다.

 

영화는 복선과 같은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요소를 너무나 곳곳에 많이 박아 둔 것 같다. 주인공과 담배는 이 영화의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담배를 욕망이라 표현한 사람도 있는데,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부분이다. 담배를 끊었다고 말하는 최현은 결국 여정과 헤어진 후 담배를 피운다. 두 개피를 한번에 피우면서 괴로워한다. 두 개피는 각각 윤희와 여정이 아닐까.

 

잔잔한 영화치고 죽음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특이하다. 영화의 첫 시작이 장례식장 방문이다. 지인의 장례식장, 노란 원피스 입은 아이와 엄마의 자살(보문호), 폭주족 사고, 이미 죽은 사람들이지만 윤희의 남편과 점집 할아버지는 모두 저세상 사람들. 여기에 고분(무덤)은 죽음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메타포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제는 역시나 잔잔한 사랑이야기다. 학창시절 호감이 있었던 여정, 아리솔 찻집 주인 윤희, 그리고 베이징에 있는 부인. 이들 세 여성은 경주라는 한 공간에서 만난다. 경주에 사는 윤희, KTX를 타고 서울에서 온 여정, 목소리를 통해 경주에 온 베이징의 아내.

 

경주 곳곳을 많이 다녀본 나는 이 영화에서 반가움을 느꼈다. 주택가 골목은 모두 한옥 지붕들이고, 도로가 옆 건물들은 모두 낮은 단층 건물들이다. 경주 시내 전체가 문화재보호지역이다보니 건물을 높게 짓거나 건물신축에 대한 제한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대릉원 뒤의 노서/노동리 고분군은 실제 가보면 피크닉 장소로 아주 좋다. 푸른 잔디와 무성한 고목은 고즈넉한 고도(古都)의 느낌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풍경이다. 바로 그 둘레로 이어진 주택과 상가는 우리나라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집과 담, 도로 사이로 고분이 맞닿아 있는 곳은 경주가 유일하다.

 

경상도 사람인 내게 영화의 또 다른 재미는 영화에 나오는 실제 경주 사람들의 사투리와 억양이다. 점집 할아버지의 '아가씨, 내 좀 봅시다. 서울 아가씨, 이쪽으로...", 점심 식사 중 여정이 울자 해장국집 주인 아주머니의 "남자가 여자를 와그래 울리노?", 최현이 윤희의 집에서 자고 나온 날 아침 칼국수 집 아저씨의 "이봐요, 거 전화 좀 받아요, 시끄러워 죽겠네", "이봐, 이봐, 이봐, 거, 식사를 했으면 돈을 주고 가야지, 거 생긴 거는 멀쩡하게 생기 가지고..."

 

그 외 출연자들이 어색할 것으로 예상되는 경상도 사투리를 연기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아는 경상도 어른들은 영화에서처럼 식당에서 간섭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분들의 행동에 나쁜 뜻은 없으니 오해는 말길... 연기가 아닌 너무 생생함을 전달한 것 같아서 조금 놀랐다. 실제 그쪽 어른들 좀 그렇다.

 

술집에서 박교수로 연기한 백현진씨는 처음에 현지 아마추어 연기자를 섭외한 줄 알았다. 딱 지방대 교수느낌이 살아 있었다. 약간은 꼰대 스타일의. 그러나 이 분이 노래하는 인디 밴드 가수라는 사실을 알면 달리 보일 것이다. 지난 2011년 MBC 나는 가수다에서 자우림과 함께 사랑밖에 난 몰라를 불러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 바 있다. 영화 말미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사랑'이라는 곡도 불렀다. 박교수를 연상하며 노래를 들으니 참으로 오묘한 느낌이 전달된다.

 

영화 '경주'는 약간 지루하지만 뜯어보면 재밌는 영화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여러가지 생각을 던져준다. 절대 친절한 감독이 아니다. 영화의 해석은 철저하게 관객의 몫임을 영화는 말없이 전하고 있다.

 

이미 극장에서는 모두 내려졌으니 VOD나 파일 다운로드로 감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잠 안 올 때 추천한다.

 

* 영화에 등장한 '아리솔' 찻집은 실제 경주 노서동에서 운영 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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