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 남도 여행(5) 푸른 기운이 감싼 5월의 도솔산 선운사
염전이 있는 곰소 슬지제빵소에서 선운사까지는 대략 40여분 걸렸다. 역시 고속도로는 패스. 일요일 오후였지만, 차가 막히는 경로는 아니었다.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 10분이며 선운사에 가기 위해 도착한 곳은 선운산 도립공원. 선운산이라고도 하지만 또 다른 이름은 도솔산. 그래서 선운사를 '도솔산 선운사'라고 부른다.
도솔은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향인 천계(天界)로, 미륵보살이 사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선운산이 그렇게 영험한 산이라는 뜻이다.
일요일 오후 3시가 넘은 시간이다보니 들어오는 사람보다 나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 보였다. 코로나19로 집안에만 갇혀 있던 사람들이 공기 좋은 공원으로 나왔으니 한창 붐빌 시간엔 제법 몰렸을 거 같았다. 남들과 달리 일요일 오후 3시의 여유로움을 느끼며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도립공원 상가지역의 바로 입구 계곡 건너편에는 '송악'이라는 천연기념물이 있는데, 덩굴식물 '송악'을 가리키는 것이다. 상록수라 사철 내내 푸르름을 자랑하는데, 지금쯤이면 검은 열매가 맺히는 시기라 한다. 암벽에 붙어 위로 자라는 습성이 있는 식물인데, 담쟁이(ivy)와 비슷하다. 요즘 우리나라 환경에선 흔치 않고, 이곳 도립공원 계곡에서 당당하게 자라고 있어서 보존가치를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송악은 주로 남부지방 산에서 잘 자란다고 하는데, 일본, 대만, 중국의 남부 등이 주요 산지라고. 현재 선운산 송악은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북쪽에서 자라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가와 오른쪽으로 조성된 선운산 생태숲을 지나 약 10분 정도 걸어가면 선운사 일주문이 보이는데, 그 앞에 매표기가 있다. 요즘엔 사람이 운영하는 매표소 보다는 이런 키오스크 기계를 두고 매표하는 곳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성인 입장료는 1인 4,000원으로 조금 비싼 느낌이다.
일주문은 사찰의 입구를 알리는 상징물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은 일주문이 있고, 대부분 웅장하게 만들어 두었다. 일주문은 대부분 근대에 재건축된 것들이다. '도솔산 선운사' 현판이 정면에 보인다. 조선시대 궁중 여인의 가채처럼 머리가 많이 무거워 보인다.
다시 잠깐의 숲길을 만나는데, 흙길이 아니라 정방형 돌이 깔린 길이다. 사람들에게나 탈 것엔 익숙하고 편안한 길이지만, 절집으로 인도하는 길은 흙이 더 어울리고 정감 있다. 양쪽 옆으로 오래된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 주는 늘 고맙고 행복한 길이다. 일요일 오후의 뙤약볕을 막아준다.
극락교가 보이니 절에 다가온 것이 분명하다. 이 다리를 건너면 인간의 세계를 넘어 부처님의 세계(극락)로 들어가는 입구다. 곧 사천왕들이 지키는 천왕문이 나온다는 안내이기도 하다. 선운사에 들어가기 전에 건물의 위치를 미리 한번 보고 들어가는 것이 좋다. 선운사는 일반적인 사찰의 건축물 대부분이 있는 곳으로, 어느 위치에 어떤 건물이 있는지 눈도장 찍고 가자.
이제 본격 선운사 도량으로 들어가기 위한 천왕문이다. 악귀를 쫓는 목적의 천왕문은 대부분의 사찰입구에 서 있다. 천왕문을 들어서기 전, 요즘 문화재 시설에 자주 볼 수 있는 안내판이 여기에도 있다. 경내 반려동물 출입금지는 반드시 숙지하고 와야 한다.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아직은 이런 장소에 함께 하기엔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관광지마다 반려동물을 잠시 맡기는 곳이 있으면 어떨까?
재밌는 사실은 선운사 천왕문에는 사천왕들이 악귀를 밟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장증장천왕 아래는 음녀(淫女)를, 서방광목천왕 아래는 탐관오리가 있어 특이하다. 불교가 우리나라로 들어오면서 토속적인 문화와 합쳐져서 변형된 것이다. 그 시절 '음녀'와 '탐관오리'는 민초들의 공공의 적이었나 보다. 이 부분을 알아보는 것도 포인트가 되겠다.
천왕문을 통과하면 넓은 운동장 같은 터 정면에 정면 9칸의 만세루가 버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절집에 저 위치면 보통 석탑이 있어야 정석일텐데, 왜 여기엔 저런 건물이 있는 것일까? 절 한가운데 만세루가 있는 곳은 청도 운문사와 고창 선운사가 유명하다. 그중에 선운사 만세루는 정면 9칸의 웅장함을 자랑하는데 국내 사찰 중 최대 길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대웅전 앞에서 예불과 설법 및 법회를 하는 공간이다. 일반적인 사찰에서는 그냥 마당에서 당(幢-불화를 그린 기)을 세워 진행했던 법단과 마당이 있던 자리인데,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건축물을 지어 이런 공간을 대신했다고 한다. 덕분에 정면에서도 대웅전은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으로는 푸르른 자태를 자신의 크기만큼이나 존재감으로 각인시키는 고송이 서 있다. 이런 날에 저런 나무는 반갑기만 하다. 그 아래 큰 그늘은 부처님의 자비처럼 시원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그 뒤로는 능인각, 동상실, 성보박물관 등이 있다.
정면에서 왼쪽을 바라보면, 바로 제일 가까운 곳은 선다원, 중간쯤에 보이는 건물이 전통적인 범종각이다. 다른 사찰은 종루형태로 존재하기도 한다. 범종이 있는 누각이다.
만세루에 가려진 바로 뒤에는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이 있는데, 현재 공사중이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처럼 옷을 입고 있는 대웅전은 보기만 해도 안쓰럽다. 비록 부처님과 마주하지는 못하지만 어서 빨리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선운사 곳곳에서 바라보는 주변 풍광은 정말 아름답다. 오래된 사찰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런 자연친화적이며, 언제나 봐도 마음 푸근해지는 풍광에 있다. 여름을 마주한 늦봄에 목마른 자들에게 감로수처럼 시원하고 청량한 곳이다. 상서로운 기운인지 하늘의 일자로 뻗은 구름마저 오늘 이 시간이 특별하다고 알려주는 것 같다.
[선운사에 대해]
선운사는 백제시대 창건된 것으로 기록이 있는 백제의 절이었다. 이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다시 조선시대 성종 때 크게 중창한 기록이 있다. 선조 때 정유재란으로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때 중창하고, 그 이후로 중건과 중창을 반복하며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홈페이지 : 도솔산 선운사 (seonunsa.org)
내게 '선운사'는 노래로 기억된다. 송창식의 '선운사'가 그 노래인데, 가사에 동백꽃이 나온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바람 불어 설운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에요
이 노래에 무슨 사연이 있을까 하고 찾아봤더니, 경향신문 기사에 나온다. 이곳이 고향인 미당 서정주 시인과도 관련 있는 노래라고. 고향이 이곳 고창 선운리인 미당의 '선운사 동구'라는 시에 대한 헌사라고 한다. 송창식이 중학생 때 미당의 강연을 듣고 감명받았으며, 나중에 가수로 유명해지자 미당의 집으로 찾아간 사연이 있다고 한다. 그때 '푸르른 날' 가사를 받아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고 인터뷰에 밝혔다. 즉, 노래 선운사는 서정주 시인에 대한 존경에서 나온 것이다.
부안군 선운리가 고향인 서정주를 기리기 위한 '미당문학관'도 근처에 있으니 찾아가 보는 것도 좋겠다.
[노래의 탄생]송창식 ‘선운사’ - 경향신문 (khan.co.kr)
그런데 어쩌나. 5월 중순에 찾은 선운사에는 아쉽게도 동백꽃은 이미 져버렸다. 동백숲은 선운사 뒤쪽 선운산 자락 쪽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동백나무를 심은 것도 사찰의 화재가 번지지 않도록 방화수 역할로 식재했다고. 동백꽃은 지난 4월의 절정을 지나 지금은 이미 눈물처럼 후드득 져버리고 없었다. 대신 동백나무를 비롯한 주변의 모든 나무들이 푸르름을 뽐내고 있었다.
고창에 가면 선운사에 꼭 들러야 한다. 그리고 뒷 산에 동백이 잘 있는지 확인하면서 절집의 풍광을 즐기며 쉬었다 오면 된다. 물론 선운산 도립공원 입구에는 풍천장어의 원산지와 요릿집이 펼쳐지기 때문에 불교에서 금하고 있는 살생이라는 과제에 대해서는 조금 더 고민하고 맛을 즐겨야 할 거 같다.
풍천은 선운산 어귀의 바닷물과 민물이 합쳐지는 인천강(주진천) 지역을 말한다. 실뱀장어가 민물에 올라와 7~9년을 살다가 산란을 위해 먼 태평양으로 회유하기 전에 잠시 머무르는 지역이 바로 이곳이며, 이때 잡힌 장어를 풍천장어라고 한다. 고창은 복분자와 풍천장어가 유명한 고장이기도 하다.
싯자락 하나 읊어 보았다. (자작)
동백꽃이 졌더라도 선운사는 서러울 필요 없다.
도솔산이 지켜보고 도솔천이 흐르는데 무엇이 아쉬울까
천년의 나무 아래 서늘한 바람이 땀을 식히거든
부처의 자비라 생각하고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보라
멀리 떠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더라도 서러워 말아라
선운 자락에서 내려온 바람이 내 얼굴을 어루만져 주리라
눈물 나게 아쉽고 아쉬운 동백이라도 다시 필 날이 있으니
오늘도 푸르고 내일도 푸르리니 동백꽃 피는 날을 기다리라
그때 다시 선운사로 돌아오리라
서해 남도 여행(6) 해남 땅끝전망대 (cuse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