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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집시간이 다가오자 102보충대 앞은 입소자와 동행한 가족, 친지들로 가득했다. 머리는 대부분이 짧게 자르고 와서 어색한 자신의 머리를 만지며 애써 웃음짓는 입소자들이 많이 보였다. 눈물을 흘리는 가족과 애인인듯한 여자. 노래를 부르며 입소하는 친구를 환송하는 친구들... 아마도 그런 광경을 본 사람들 많을 것이다.
소집시간에 맞추어 보충대는 마이크를 통해 입소자를 제외한 모두 보충대 밖으로 나가줄 것을 방송한다. 슬슬 긴장되는 분위기... 아니나 다를까 입소자를 뺀 나머지 사람들이 나가자 한무리의 군인들이 입소자를 정렬시키고 있었다. 육중한 입구의 철문을 닫자마자 엄포를 놓는 마이크 소리가 쩌렁 쩌렁 울린다. 소위 '군기'잡기가 시작되었다.
눈이 많이 온 바닥은 흰 눈으로 다져져 있었는데, 느닷없이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의 구령이 떨어진다. 눈치 빠른 친구들은 동작을 취하지만 어리벙벙한 대부분의 입소자들은 비로소 여기가 군대임을 깨닫고 그제서야 따라 한다.
'머리 안깎고 들어온 개새끼 앞으로 집합!', 말도 상스러운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머리 깎지않고 들어가도 머리 깎아준다는 말을 들은 친구들은 몇 안되었지만 명령에 따라 집합했다. 이 친구들은 이미 머리를 깎고 온 입소자에게 본보기라도 보이듯이 '바리깡'이라고 불리는 이발도구로 아무렇게나 머리카락을 잘리고 있었다.
군복사이즈를 결정받고 보충대 생활에 대해 설명을 들은 후 소대를 나누었다. 처음으로 저녁 식사를 하게 된 입소자들은 그 날 저녁 받아본 소위 군대 '짠밥'을 대부분 남겼다. 나도 도저히 입맛이 없어서 한두숫가락 후 놓아 버렸다. 보충대 군인들은 그러면 그렇지 라는 식의 비웃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날 저녁, 정말 눈물이 나는 일이 있었다.
저녁때 내무반 마다 사복과 개인 사물을 모두 내놓고 부모님께 편지를 쓸 종이를 주었다. '시간은 딱 5분 주겠다! 실시!' 이렇게 명령을 받은 내무반 친구들은 모두들 군복으로 갈아입고는 사복을 챙겼다. 수첩, 시계, 반지 등등 군인이 가지고 있어서는 안되는 것들을 모두 내놨다. 신발도 보내야 한다. 심지어는 양말과 팬티까지 모두 짐에 같이 싸야 했한다. 묵묵히 짐을 싸고는 어느새 부모님께 편지를 쓰는 친구들... 그들 대부분은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그렇게 싼 옷가지며 소지품을 부모님이 받으시면 그때 부모님들 또 한번 우신다. 내 부모님은 그때의 기억을 마치 아들의 유품을 받은 것 같다고 회상하셨다.
보충대 첫날밤 가장 괴로운 것은 바로 불침번이었다. 한번도 새벽에 누가 깨워 일어나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일어나기가 정말 힘들었다. 일어나자 마나 구역질이 날 정도로 괴로운 일이었다.
그 해는 눈이 많이 와서 보충대 생활의 대부분은 눈을 치우다가 끝났다. 보충대는 소위 말해서 배치받기 전에 임시로 모이는 장소였다. 3~4일 정도 머물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해서 보충대 생활을 며칠간 마치면 지역 부대(사단)로 배속을 받아 신병훈련소로 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어디 어디로 가면 편하고 어디 어디로 가면 힘들다더라라며 이야기가 나돌았다. '1군 사령부로 가면 편하고, 양구나 인제로 가면 고생한다. 소양호를 건너 배를 타고가면 고생하고 버스타고 이동하면 좋은 곳이다.' 등등 온갖 소문이 나돌았다. 난 다행하게도 버스를 타고 바다가 보이는 강원도 고성으로 가게 되었다.
신병교육대는 6주간 기본적인 군사훈련을 받는 곳이다. 제대할 때도 다시 오게 되는 곳이다. 신병과 제대병이 같이 모이는 묘한 장소였다. 제대 마크를 단 군인들과 아직 작대기 하나(이등병)도 못단 훈련병들이 각자 생활을 하는 곳. 언제나 훈련병들의 바람은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겠지...'라는 것뿐이었다.
소대단위로 인원을 배정받고, 그 중에 가장 뛰어난 훈련병을 '향도'라는 이름으로 훈련병들의 리더가 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향도'들은 신병교육대 훈련을 마치자 마자 '특별 휴가'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훈련 마지막이 되면 가족들을 불러 훈련소 퇴소식을 가진다. 그때만해도 정말 훈련병들은 잠시동안 가족을 볼 수 있다는 신념으로 열심히 했었다. 그 사이에 다른 기수들의 신병이 들어오고, 그들은 마치 초등학교 1학년처럼 보였다. 신병 훈련소 기수도 나중에는 고참, 쫄병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보통은 한달 단위 입소 군번으로 선임병과 후임병을 구분한다. 소위 '몇월군번'이라고 불리는 계급제도이다.
드디어 퇴소식 날이 오고 가족들이 모인 가운데 퇴소식 행사를 한다. 제식 훈련과 각종 시범들을 보인 후 우수 사병 포창과 함께 오후엔 가족 면회를 한다. 이때 정성스런 도시락을 싸온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 그 짧은 몇시간 아들을 보기 위해 6시간 이상을 찾아오신 부모님들이었다. 짧은 시간을 보낸후 자대배치라고 해서 근무할 부대에서 차량이 온다. 흔히 더블백이라고 부르는 자루에 자기의 관물을 챙겨 '육공트럭'같은 것을 타고 자대로 간다.
자대는 보통 연대단위로 배치받는다. 직할 부대가 아닌 이상 일반 육군 부대는 연대에서 또 다시 대기를 며칠동안 한다. 여기서 다시 자신이 최종 복무할 대대로 배치 받는다. 이때 연대 인사계에서는 TO라는 것에 맞게 각 대대로 인원을 배치하게 된다. 특기병의 경우 TO가 있는 곳에 보낸다. 어디든 마찬가지지만 상급부대는 말단부대보다 편하다. 난 다행하게도 대대를 배속받으며 행정병으로 근무를 하게 되었다. 중대까지 내려가지 않게 된 것이다. 당시, 내 또래 같은 군번들 중에 대학생이 거의 없었던 이유로 내가 행정병으로 가게 되었었다.
사실 군생활에 있어서 가장 힘들면서 가장 재밌는 시기 중에 하나가 바로 이등병 생활이다. 그리고 바로 이때부터 제대할때까지의 운이 결정되는 시기다. 자기 바로 위 고참이 많으면 제대할때까지 힘든 것이고, 윗 고참과의 차이가 많이 나면 그만큼 편한 것이다. 진급을 하다보면 위 고참이 제대를 많이 하기 때문이다. 소위 왕고 생활을 오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등병 때는 뭐를 잘못해도 대부분 용서를 받는다. 그래서 이등병처럼 되지 말라는 소리가 훈시의 내용이었던 적이 많았다. 뭘 잘못하면 '네가 이등병이냐?'라는 질책을 받았으니까... 막내가 귀한 부대의 경우 이등병은 고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 한다. 사실 좀 생각해 보면 징그럽게도 느껴지지만, 남자들끼리도 후임병이 들어오면 그렇게 어리숙해 보이고 귀여워 보인다. 아직 군생활에 대해 잘 모르니 놀리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고 하면 재밌다. 난 다행히 정말 좋은 고참들을 만나서 즐겁게 이등병 생활을 시작했었다.
내가 군생활을 하던 시기는 '구타근절'을 아주 강하게 주장하던 시절이었다. 소위 선후임병간 구타가 많이 사라지던 시기였다. 하루를 빼먹으면 걱정이 되어 잠이 안온다는 '빵빠레'도 거의 사라졌던 시기였다. 대대 본부라서 그런지 몰라도 당시에도 중대에서는 가끔 '빵빠레'가 있었던 것을 목격했다. 어쨋든 맞지않고 군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모른다. 사실 그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구타는 종종 있었다. 하지만 참을만 했다.
당시에는 같은 중대원들간에 '조'라는 계급별로 사병들끼리 만들어 놓은 역할 분담이 있었다. '식기조, 관물조, 침상조, 물걸레조' 등등, 조가 바뀌어 자신의 역할이 점점 고참이 되어갈수록 편해진다. 하지만 군에서 정식 계통으로는 '조'를 인정하지 않는다. 사병문화인데, 첨엔 거부감이 느껴지지만, 효율적인 역할분담 문화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역할 분담도 상병일때가 거의 최고조에 이른다. 사실 군대에서 이등병은 정말 초년병이고, 앞에서 가장 열심히 뛰어야할 계급이 일병, 일병들을 이끌고 가장 앞장서는 상병, 그리고 병들의 왕인 병장이 있었다. 나도 어서 병장이 되어 '조'에서 빠져야 할텐데 라는 생각은 늘 머리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이렇듯 군생활은 계급을 구분으로 점점 생활이 익숙해져 가게 된다.
이등병에서 일병 계급을 달 때쯤 첫 진급휴가를 나간다. 위수지역을 벗어나 가족을 만날 수 있는 첫 휴가 때는 모든 부대원들이 축하해 준다. 군화도 닦아주고 옷도 다려주고, 그럴 때 사실 끈끈한 전우애를 느낀다.
(길어져서 한번더 계속...)
소집시간에 맞추어 보충대는 마이크를 통해 입소자를 제외한 모두 보충대 밖으로 나가줄 것을 방송한다. 슬슬 긴장되는 분위기... 아니나 다를까 입소자를 뺀 나머지 사람들이 나가자 한무리의 군인들이 입소자를 정렬시키고 있었다. 육중한 입구의 철문을 닫자마자 엄포를 놓는 마이크 소리가 쩌렁 쩌렁 울린다. 소위 '군기'잡기가 시작되었다.
눈이 많이 온 바닥은 흰 눈으로 다져져 있었는데, 느닷없이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의 구령이 떨어진다. 눈치 빠른 친구들은 동작을 취하지만 어리벙벙한 대부분의 입소자들은 비로소 여기가 군대임을 깨닫고 그제서야 따라 한다.
'머리 안깎고 들어온 개새끼 앞으로 집합!', 말도 상스러운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머리 깎지않고 들어가도 머리 깎아준다는 말을 들은 친구들은 몇 안되었지만 명령에 따라 집합했다. 이 친구들은 이미 머리를 깎고 온 입소자에게 본보기라도 보이듯이 '바리깡'이라고 불리는 이발도구로 아무렇게나 머리카락을 잘리고 있었다.
군복사이즈를 결정받고 보충대 생활에 대해 설명을 들은 후 소대를 나누었다. 처음으로 저녁 식사를 하게 된 입소자들은 그 날 저녁 받아본 소위 군대 '짠밥'을 대부분 남겼다. 나도 도저히 입맛이 없어서 한두숫가락 후 놓아 버렸다. 보충대 군인들은 그러면 그렇지 라는 식의 비웃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날 저녁, 정말 눈물이 나는 일이 있었다.
저녁때 내무반 마다 사복과 개인 사물을 모두 내놓고 부모님께 편지를 쓸 종이를 주었다. '시간은 딱 5분 주겠다! 실시!' 이렇게 명령을 받은 내무반 친구들은 모두들 군복으로 갈아입고는 사복을 챙겼다. 수첩, 시계, 반지 등등 군인이 가지고 있어서는 안되는 것들을 모두 내놨다. 신발도 보내야 한다. 심지어는 양말과 팬티까지 모두 짐에 같이 싸야 했한다. 묵묵히 짐을 싸고는 어느새 부모님께 편지를 쓰는 친구들... 그들 대부분은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그렇게 싼 옷가지며 소지품을 부모님이 받으시면 그때 부모님들 또 한번 우신다. 내 부모님은 그때의 기억을 마치 아들의 유품을 받은 것 같다고 회상하셨다.
보충대 첫날밤 가장 괴로운 것은 바로 불침번이었다. 한번도 새벽에 누가 깨워 일어나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일어나기가 정말 힘들었다. 일어나자 마나 구역질이 날 정도로 괴로운 일이었다.
그 해는 눈이 많이 와서 보충대 생활의 대부분은 눈을 치우다가 끝났다. 보충대는 소위 말해서 배치받기 전에 임시로 모이는 장소였다. 3~4일 정도 머물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해서 보충대 생활을 며칠간 마치면 지역 부대(사단)로 배속을 받아 신병훈련소로 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어디 어디로 가면 편하고 어디 어디로 가면 힘들다더라라며 이야기가 나돌았다. '1군 사령부로 가면 편하고, 양구나 인제로 가면 고생한다. 소양호를 건너 배를 타고가면 고생하고 버스타고 이동하면 좋은 곳이다.' 등등 온갖 소문이 나돌았다. 난 다행하게도 버스를 타고 바다가 보이는 강원도 고성으로 가게 되었다.
신병교육대는 6주간 기본적인 군사훈련을 받는 곳이다. 제대할 때도 다시 오게 되는 곳이다. 신병과 제대병이 같이 모이는 묘한 장소였다. 제대 마크를 단 군인들과 아직 작대기 하나(이등병)도 못단 훈련병들이 각자 생활을 하는 곳. 언제나 훈련병들의 바람은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겠지...'라는 것뿐이었다.
소대단위로 인원을 배정받고, 그 중에 가장 뛰어난 훈련병을 '향도'라는 이름으로 훈련병들의 리더가 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향도'들은 신병교육대 훈련을 마치자 마자 '특별 휴가'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훈련 마지막이 되면 가족들을 불러 훈련소 퇴소식을 가진다. 그때만해도 정말 훈련병들은 잠시동안 가족을 볼 수 있다는 신념으로 열심히 했었다. 그 사이에 다른 기수들의 신병이 들어오고, 그들은 마치 초등학교 1학년처럼 보였다. 신병 훈련소 기수도 나중에는 고참, 쫄병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보통은 한달 단위 입소 군번으로 선임병과 후임병을 구분한다. 소위 '몇월군번'이라고 불리는 계급제도이다.
드디어 퇴소식 날이 오고 가족들이 모인 가운데 퇴소식 행사를 한다. 제식 훈련과 각종 시범들을 보인 후 우수 사병 포창과 함께 오후엔 가족 면회를 한다. 이때 정성스런 도시락을 싸온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 그 짧은 몇시간 아들을 보기 위해 6시간 이상을 찾아오신 부모님들이었다. 짧은 시간을 보낸후 자대배치라고 해서 근무할 부대에서 차량이 온다. 흔히 더블백이라고 부르는 자루에 자기의 관물을 챙겨 '육공트럭'같은 것을 타고 자대로 간다.
자대는 보통 연대단위로 배치받는다. 직할 부대가 아닌 이상 일반 육군 부대는 연대에서 또 다시 대기를 며칠동안 한다. 여기서 다시 자신이 최종 복무할 대대로 배치 받는다. 이때 연대 인사계에서는 TO라는 것에 맞게 각 대대로 인원을 배치하게 된다. 특기병의 경우 TO가 있는 곳에 보낸다. 어디든 마찬가지지만 상급부대는 말단부대보다 편하다. 난 다행하게도 대대를 배속받으며 행정병으로 근무를 하게 되었다. 중대까지 내려가지 않게 된 것이다. 당시, 내 또래 같은 군번들 중에 대학생이 거의 없었던 이유로 내가 행정병으로 가게 되었었다.
사실 군생활에 있어서 가장 힘들면서 가장 재밌는 시기 중에 하나가 바로 이등병 생활이다. 그리고 바로 이때부터 제대할때까지의 운이 결정되는 시기다. 자기 바로 위 고참이 많으면 제대할때까지 힘든 것이고, 윗 고참과의 차이가 많이 나면 그만큼 편한 것이다. 진급을 하다보면 위 고참이 제대를 많이 하기 때문이다. 소위 왕고 생활을 오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등병 때는 뭐를 잘못해도 대부분 용서를 받는다. 그래서 이등병처럼 되지 말라는 소리가 훈시의 내용이었던 적이 많았다. 뭘 잘못하면 '네가 이등병이냐?'라는 질책을 받았으니까... 막내가 귀한 부대의 경우 이등병은 고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 한다. 사실 좀 생각해 보면 징그럽게도 느껴지지만, 남자들끼리도 후임병이 들어오면 그렇게 어리숙해 보이고 귀여워 보인다. 아직 군생활에 대해 잘 모르니 놀리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고 하면 재밌다. 난 다행히 정말 좋은 고참들을 만나서 즐겁게 이등병 생활을 시작했었다.
내가 군생활을 하던 시기는 '구타근절'을 아주 강하게 주장하던 시절이었다. 소위 선후임병간 구타가 많이 사라지던 시기였다. 하루를 빼먹으면 걱정이 되어 잠이 안온다는 '빵빠레'도 거의 사라졌던 시기였다. 대대 본부라서 그런지 몰라도 당시에도 중대에서는 가끔 '빵빠레'가 있었던 것을 목격했다. 어쨋든 맞지않고 군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모른다. 사실 그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구타는 종종 있었다. 하지만 참을만 했다.
당시에는 같은 중대원들간에 '조'라는 계급별로 사병들끼리 만들어 놓은 역할 분담이 있었다. '식기조, 관물조, 침상조, 물걸레조' 등등, 조가 바뀌어 자신의 역할이 점점 고참이 되어갈수록 편해진다. 하지만 군에서 정식 계통으로는 '조'를 인정하지 않는다. 사병문화인데, 첨엔 거부감이 느껴지지만, 효율적인 역할분담 문화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역할 분담도 상병일때가 거의 최고조에 이른다. 사실 군대에서 이등병은 정말 초년병이고, 앞에서 가장 열심히 뛰어야할 계급이 일병, 일병들을 이끌고 가장 앞장서는 상병, 그리고 병들의 왕인 병장이 있었다. 나도 어서 병장이 되어 '조'에서 빠져야 할텐데 라는 생각은 늘 머리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이렇듯 군생활은 계급을 구분으로 점점 생활이 익숙해져 가게 된다.
이등병에서 일병 계급을 달 때쯤 첫 진급휴가를 나간다. 위수지역을 벗어나 가족을 만날 수 있는 첫 휴가 때는 모든 부대원들이 축하해 준다. 군화도 닦아주고 옷도 다려주고, 그럴 때 사실 끈끈한 전우애를 느낀다.
(길어져서 한번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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