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내가 현재의 위치에서 직업을 갖게된 결정적인 일이 바로 11년전 봄에 생겼었다. 문득 며칠전 만난 그때 같이 함께 활동을 하던 대학 후배들을 만나는 자리가 잠시 그 시절을 돌아보게 만든 기회였다.
AIR (Association of Internet Research) : 인터넷 연구회
이런 멋진 이름과 활동을 만들어낸 그때의 선후배들에게 미리 감사의 말을 전한다.
1993년 쯤으로 기억한다. 내가 학교 전산실을 찾아서 인터넷을 접한 시기가 그때였다. 내가 다니던 경북대학교는 대구경북지역 연구전산망센터(Kreonet)가 있었다. 연구전산망은 각지역별로 센터가 있었는데, 대구 경북지역의 연구전산망 허브역할을 했다. 우리 학교에서부터 인근 연구소나 학교로 연구전산망이 연결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으로 한 써클후배가 내게 학교에 연결된 인터넷의 존재에 대해 알려주었다. 당시엔 단말기 실습실이 있었는데, 이 단말기가 해외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단말기는 소위 중앙 컴퓨터와 이 컴퓨터와 연결된 더미 터미널로 구성이 되어 있었으며, 학생들이 더미 터미널을 통해 프로그램을 작성해서 컴파일을 하던 그런 실습실에 있었다.
VAX라고 하는 지금은 없어진 DEC(컴팩에 합병되었고 다시 컴팩은 HP에 합병되었다)라는 회사에서 나온 컴퓨터였다. 이 컴퓨터 자원을 사용하기 위해 학교 전자계산소(줄여서 전산소)가 있었고, 사용 방법은 사용 신청서를 제출하고 시간이나 다른 과금 방법을 통해 사용할 수 있었다. Fortran 77이란 언어로 프로그래밍을 하고 이를 VAX를 통해 실행시켜보는 수업이 있었다. 그러면서 전산실을 출입할 수 있었는데, 한 후배로부터 인터넷의 존재를 그때 처음 알게된 시기였다.
telnet, ftp, gopher, e-mail 등등 지금도 새록새록 기억이 나는 그때의 용어들... IRC를 처음 알게 되었고, 외국인과 채팅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었다. 해외에 있는 서버에 접속해서 자료를 가져올 수 있었다는 것과 지금의 브라우저가 나오기 전에 gopher라는 툴로 텍스트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향후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전망을 했었다.
전산소의 1개 방은 단말기 10대 정도로 구성되어 있는 공개된 방이 하나 있었다. 나처럼 인터넷을 알게 된 몇명이 출입하게 되었고, 매일 저녁때나 쉬는 시간에는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거기서는 서로 모르는 재학생이지만 아는 정보를 교환해 가며 인터넷에 빠지게 되었다. 혼자 조금씩 알던 지식은 여럿이 모여 정보를 나누다보니 빠른 시간에 많은 것을 습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나와 인터넷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수업을 들어도 늘 머리속엔 전산실 단말기에 앉아 인터넷하는 생각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것이 아마도 인터넷 중독이 아니었을까 싶다. :) 그렇게 1년 정도를 보내고 나서 학교 내부에 컴퓨터 관련학과에서도 인터넷을 연결해서 사용중이었고, 자체 BBS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시절엔 PC통신이 널리 퍼져 있었고, PC통신에 인터넷이 연결되던 초기 시절이었다. 단말기를 통한 BBS 연결은 통신 비용이 전혀들지 않는 방법이었다. telnet으로 접속이 가능했기 때문에, 또 PC통신들 역시 전화 연결없이 telnet 접속이 가능했었다.
당시 학교엔 홈페이지가 없었다. Netscape의 전신인 Mosaic이 처음으로 만들어져 해외에선 사용 중이었다. 국내에도 홈페이지는 몇 개 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나와 전산실을 다니던 몇몇 학우들과 컴퓨터 과학과 학생들이 알고 있었고, 학교 홈페이지를 만들자는 의견하나로 만들어진 동아리가 바로 AIR였다.
나와 컴퓨터과학과의 몇 명이 주도가 되어 모임을 만들게 되었다. 사실상 나만 복학생이었고, 나머진 대부분 일반 재학생들이었다. 그래서 얼떨결에 내가 초대 회장을 맡게 되었고, 그때부터 본격적인 인터넷과 웹의 세계로 뛰어들게 되었다. 학교 홈페이지를 만들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했던 일은 웹서버와 홈페이지를 공동 작업할 수 있는 공동의 공간이었다. 당시 전자계산소 소장님이셨던 전자공학과 교수님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두가지 지원을 부탁드렸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서버와 공간을 마련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학교 홈페이지는 학생들이 만들어야 되는 것이 아니다. 당시엔 웹이라는 것이 생소했기 때문에 html을 알고 있었던 학생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곳이 종종 있었다. 우리가 학교 홈페이지를 만드려고 하던 시기에 이웃 영남대학교에서 먼저 만들었다. 거기에 홈페이지 만드는 작업을 지원했던 사람 역시 우리와 같이 전산소를 출입하던 재학생이었다.
이렇게 해서 학교 홈페이지를 만들고, 우린 그 홈페이지를 1년 6개월 가까이 운영했었고 나중에는 운영권을 전산소(학교)측으로 넘겼다. 그런 일로 우리 동아리 AIR는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 기간 중에 학교에 인터넷과 웹을 알리는 공개 강좌를 서너차례 진행했었고, 당시 관심이 많았던 학생들이 많이 참여했었다. 이런 자발적인 인터넷 공부와 연구는 우리 학교 뿐만 아니라 대전과 서울, 부산 등을 중심으로 자생적인 모임들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당시 이런 모임들이 웹코리아(WWW-KR)라는 것으로 발전했었다. 지금은 웹코리아 세미나가 없어졌지만 당시엔 최첨단 기술인 인터넷과 웹을 다루는 전문가들의 모임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모임으로 인해, 외부로 알려지게 되었고, 결국 이 소식을 들은 학교 선배와 함께 창업을 하게 된 것이었다. 당시 그 회사는 홈페이지를 제작할 줄 아는 지방 최초의 회사였다. 나머지는 대부분 서울 소재 기업이었다. 같은 업종의 회사가 손으로 꼽아 10개가 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당시 비슷하게 출발해서 크게 성공한 회사가 다음 커뮤니테이션이다. 당시 다음은 온라인 갤러리 사업과 웹 에이전시를 병행하던 회사였다.
이런 히스토리는 언젠가 한번은 남겨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당시에 활동을 하던 후배들과 간단한 송년회 자릴 하다가 archive.org에 들어가서 당시 우리들의 홈페이지를 찾아보았다. 우리가 만든 학교 홈페이지는 robots.txt로 막혀 있어서 저장이 되어 있지 않았지만, 우리들의 홈페이지는 남아 있었다.
이 홈페이지는 학교측의 배려로 서버명(air.kyungpook.ac.kr)을 받아서 운영했다. 학부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학교 홈페이지를 만들고 운영하던 것에 대한 보답으로 받은 IP와 도메인 주소였으며, 당시 서버는 펜티엄 서버였다. 이 서버는 외부 업체의 일부 기증과 회원들의 기부로 운영되었다.
우리가 만들었던 AIR라는 비공식적인(학교에 등록한 동아리가 아니었다) 동아리는 그 후로 신입회원들을 받다가 컴퓨터과학과의 과 소모임 형태로 바뀌었고, 지금은 없어졌다.
당시의 원년 멤버들은 나를 비롯해서 대부분이 현재 한국 IT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archive.org를 통해 그때 홈페이지를 보자, 갑자기 그때가 그리워진다. 기술은 늘 발전할 것이다. 그런 기술을 가지고 순수한 열정으로 뭔가를 해냈던 그런 분위기가 그립다.
10년이나 훌쩍 지나버린 그 시절의 홈페이지를 보면서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여행을 해 보았다. 쌩유! archive.org!
AIR (Association of Internet Research) : 인터넷 연구회
이런 멋진 이름과 활동을 만들어낸 그때의 선후배들에게 미리 감사의 말을 전한다.
1993년 쯤으로 기억한다. 내가 학교 전산실을 찾아서 인터넷을 접한 시기가 그때였다. 내가 다니던 경북대학교는 대구경북지역 연구전산망센터(Kreonet)가 있었다. 연구전산망은 각지역별로 센터가 있었는데, 대구 경북지역의 연구전산망 허브역할을 했다. 우리 학교에서부터 인근 연구소나 학교로 연구전산망이 연결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으로 한 써클후배가 내게 학교에 연결된 인터넷의 존재에 대해 알려주었다. 당시엔 단말기 실습실이 있었는데, 이 단말기가 해외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단말기는 소위 중앙 컴퓨터와 이 컴퓨터와 연결된 더미 터미널로 구성이 되어 있었으며, 학생들이 더미 터미널을 통해 프로그램을 작성해서 컴파일을 하던 그런 실습실에 있었다.
VAX라고 하는 지금은 없어진 DEC(컴팩에 합병되었고 다시 컴팩은 HP에 합병되었다)라는 회사에서 나온 컴퓨터였다. 이 컴퓨터 자원을 사용하기 위해 학교 전자계산소(줄여서 전산소)가 있었고, 사용 방법은 사용 신청서를 제출하고 시간이나 다른 과금 방법을 통해 사용할 수 있었다. Fortran 77이란 언어로 프로그래밍을 하고 이를 VAX를 통해 실행시켜보는 수업이 있었다. 그러면서 전산실을 출입할 수 있었는데, 한 후배로부터 인터넷의 존재를 그때 처음 알게된 시기였다.
telnet, ftp, gopher, e-mail 등등 지금도 새록새록 기억이 나는 그때의 용어들... IRC를 처음 알게 되었고, 외국인과 채팅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었다. 해외에 있는 서버에 접속해서 자료를 가져올 수 있었다는 것과 지금의 브라우저가 나오기 전에 gopher라는 툴로 텍스트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향후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전망을 했었다.
전산소의 1개 방은 단말기 10대 정도로 구성되어 있는 공개된 방이 하나 있었다. 나처럼 인터넷을 알게 된 몇명이 출입하게 되었고, 매일 저녁때나 쉬는 시간에는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거기서는 서로 모르는 재학생이지만 아는 정보를 교환해 가며 인터넷에 빠지게 되었다. 혼자 조금씩 알던 지식은 여럿이 모여 정보를 나누다보니 빠른 시간에 많은 것을 습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나와 인터넷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수업을 들어도 늘 머리속엔 전산실 단말기에 앉아 인터넷하는 생각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것이 아마도 인터넷 중독이 아니었을까 싶다. :) 그렇게 1년 정도를 보내고 나서 학교 내부에 컴퓨터 관련학과에서도 인터넷을 연결해서 사용중이었고, 자체 BBS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시절엔 PC통신이 널리 퍼져 있었고, PC통신에 인터넷이 연결되던 초기 시절이었다. 단말기를 통한 BBS 연결은 통신 비용이 전혀들지 않는 방법이었다. telnet으로 접속이 가능했기 때문에, 또 PC통신들 역시 전화 연결없이 telnet 접속이 가능했었다.
당시 학교엔 홈페이지가 없었다. Netscape의 전신인 Mosaic이 처음으로 만들어져 해외에선 사용 중이었다. 국내에도 홈페이지는 몇 개 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나와 전산실을 다니던 몇몇 학우들과 컴퓨터 과학과 학생들이 알고 있었고, 학교 홈페이지를 만들자는 의견하나로 만들어진 동아리가 바로 AIR였다.
나와 컴퓨터과학과의 몇 명이 주도가 되어 모임을 만들게 되었다. 사실상 나만 복학생이었고, 나머진 대부분 일반 재학생들이었다. 그래서 얼떨결에 내가 초대 회장을 맡게 되었고, 그때부터 본격적인 인터넷과 웹의 세계로 뛰어들게 되었다. 학교 홈페이지를 만들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했던 일은 웹서버와 홈페이지를 공동 작업할 수 있는 공동의 공간이었다. 당시 전자계산소 소장님이셨던 전자공학과 교수님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두가지 지원을 부탁드렸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서버와 공간을 마련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학교 홈페이지는 학생들이 만들어야 되는 것이 아니다. 당시엔 웹이라는 것이 생소했기 때문에 html을 알고 있었던 학생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곳이 종종 있었다. 우리가 학교 홈페이지를 만드려고 하던 시기에 이웃 영남대학교에서 먼저 만들었다. 거기에 홈페이지 만드는 작업을 지원했던 사람 역시 우리와 같이 전산소를 출입하던 재학생이었다.
이렇게 해서 학교 홈페이지를 만들고, 우린 그 홈페이지를 1년 6개월 가까이 운영했었고 나중에는 운영권을 전산소(학교)측으로 넘겼다. 그런 일로 우리 동아리 AIR는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 기간 중에 학교에 인터넷과 웹을 알리는 공개 강좌를 서너차례 진행했었고, 당시 관심이 많았던 학생들이 많이 참여했었다. 이런 자발적인 인터넷 공부와 연구는 우리 학교 뿐만 아니라 대전과 서울, 부산 등을 중심으로 자생적인 모임들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당시 이런 모임들이 웹코리아(WWW-KR)라는 것으로 발전했었다. 지금은 웹코리아 세미나가 없어졌지만 당시엔 최첨단 기술인 인터넷과 웹을 다루는 전문가들의 모임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모임으로 인해, 외부로 알려지게 되었고, 결국 이 소식을 들은 학교 선배와 함께 창업을 하게 된 것이었다. 당시 그 회사는 홈페이지를 제작할 줄 아는 지방 최초의 회사였다. 나머지는 대부분 서울 소재 기업이었다. 같은 업종의 회사가 손으로 꼽아 10개가 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당시 비슷하게 출발해서 크게 성공한 회사가 다음 커뮤니테이션이다. 당시 다음은 온라인 갤러리 사업과 웹 에이전시를 병행하던 회사였다.
이런 히스토리는 언젠가 한번은 남겨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당시에 활동을 하던 후배들과 간단한 송년회 자릴 하다가 archive.org에 들어가서 당시 우리들의 홈페이지를 찾아보았다. 우리가 만든 학교 홈페이지는 robots.txt로 막혀 있어서 저장이 되어 있지 않았지만, 우리들의 홈페이지는 남아 있었다.
이 홈페이지는 학교측의 배려로 서버명(air.kyungpook.ac.kr)을 받아서 운영했다. 학부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학교 홈페이지를 만들고 운영하던 것에 대한 보답으로 받은 IP와 도메인 주소였으며, 당시 서버는 펜티엄 서버였다. 이 서버는 외부 업체의 일부 기증과 회원들의 기부로 운영되었다.
우리가 만들었던 AIR라는 비공식적인(학교에 등록한 동아리가 아니었다) 동아리는 그 후로 신입회원들을 받다가 컴퓨터과학과의 과 소모임 형태로 바뀌었고, 지금은 없어졌다.
당시의 원년 멤버들은 나를 비롯해서 대부분이 현재 한국 IT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archive.org를 통해 그때 홈페이지를 보자, 갑자기 그때가 그리워진다. 기술은 늘 발전할 것이다. 그런 기술을 가지고 순수한 열정으로 뭔가를 해냈던 그런 분위기가 그립다.
10년이나 훌쩍 지나버린 그 시절의 홈페이지를 보면서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여행을 해 보았다. 쌩유! archive.org!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