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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정쌈밥에서 점심을 배부르게 먹었다.

쌈밥집에서 바로 나오면 첨성대와 저 멀리에 계림이 보인다. 그리고 그 사이길에 웬 마차가 서 있다. 관광 체험 마차타기용이다. 계림숲 입구까지 왕복해서 다녀오는 것이라고 한다. 요금은 3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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쌈밥집에서 나와서 바로 앞쪽에 보이는 첨성대를 들렀다.

첨성대는 선덕여왕때 만들어진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관측대라고 한다. 관측대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긴 하다. 경주를 대표하는 이미지 중의 하나가 바로 첨성대이다.

첨성대는 입장료를 내는 안쪽 지역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밖에서 보인다. 굳이 입장료를 받는 이유가 궁색하다. 비록 입장료는 몇백원이지만, 경주시에서 첨성대만 보호하는 선에서 입장료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몇백원이지만 돈내고 들어갔다가 볼 것 없이 금방 나오면 기분이 찜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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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를 잠시 둘러보고 나오면, 바로 앞쪽 멀리에 계림과 석빙고 가는 길 그리고 반월성터가 보인다. 계림과 석빙고 반월성터는 모두 입장료가 없이 이용이 가능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이곳으로 단체야유회를 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반)월성은 신라의 궁전이 있던 궁터이다. 경주의 평야가 골고루 보이는 약간 융기된 땅터인데, 이곳을 중심으로 길과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경주박물관에는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미니어처가 있는데, 이를보면 이해가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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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鷄林)은 원래 '시림(始林)'이라 불렸었다. 계림은 경주 김(金)씨의 시조인 알지(閼智)의 전설이 남아있는 유서 깊은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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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순조 때 세워진 김알지 탄생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는 비가 있다. 문의 입구는 잠겨 있어서 자세히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냥 덩그러니 숲 중간에 비를 모신 건물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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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의 서쪽 끝에는 능이 하나 있는데, 신라 17대 내물왕릉이다. 삼국유사 기록에 따라 이 능이 내물왕일것으로 추정하였다. 내물왕릉이 첨성대 서남쪽에 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내물왕은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왜구의 침입을 물리쳐 외교와 국방에 힘썼으며, 고대 국가 체제를 확립한 신라왕이다.

계림숲에는 오래된 혜화나무들이 많다. 그 중에도 오래되고 속이 빈 혜화나무가 한그루 있는데, 지난 태풍 매미때 피해를 입어 보수를 해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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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중간은 바위가 아니라 표면을 바위처럼 꾸며놓은 스티로폼이다. 그 주위를 둘러싼 나무가 살아있는 혜화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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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에는 이런 오래된 혜화나무가 많다. 그 그늘아래 뜨거운 햇살을 피해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연인들도 많았다. 자연휴양림같은 분위기를 맛볼 수 있다. 왼쪽 향교가 있는 방향쪽엔 작은 냇물도 흐르고 있는데, 여기가 신라의 고도 경주라서 그런지 더더욱 운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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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을 바로 나오면 작은 언덕이 하나 보인다. 언덕을 올라 왼쪽(동쪽 방향)으로 가면 석빙고가 있고, 넓은 운동장 같은 잔디밭이 펼쳐진다. 이 전체가 월성터이다. 예전 왕궁터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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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쪽으로 길게 이어진 언덕은 평평하면서 잔디가 넓게 펼쳐져 있다. 잔디와 함께 토끼풀이 무리지어 피어있다. 몇개 꺾어 시계꽃이라도 만들어 보려 했으나 넓게 퍼져 피고있는 꽃들이 너무 아름다워 그만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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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 방향쪽으로 걸어가자 석빙고를 볼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돌로 만들어진 얼음 창고가 석빙고이다. 석빙고는 신라유적이 아니라 조선시대의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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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석빙고는 조선 영조 17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원래 자리는 서쪽으로 100미터 지점에 있었으나 만든지 3년만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는 기록의 비문이 옆에 있다. 안쪽은 물이 빠질 수 있도록 홈이 파여 있고, 위에는 공기 구멍이 3개가 나 있다. 입구쪽엔 문이 잠겨 있는데, 얼굴을 내 밀어보니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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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빙고가 위치한 이곳은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고 해서 월성이라불렸으며,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반월성이라 불렀다. 신라 5대 파사왕때부터 이곳에 성을 지어 살았다고 한다. 남쪽에는 남천이 흐르고 있고, 동쪽, 북쪽, 서쪽으로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해자를 파놨다.

월성 동쪽을 나서면 길건너편에 안압지로 알려진 임해전지가 나온다.

안압지는 신라 문무왕이 큰 연못을 파고 3개의 섬와 12개의 봉우리를 만들었다. 일종의 별궁이다. 유적지 중간에 임해전이라는 건물을 만들어 놨으며,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외국에서 귀한 손님이 올 경우 연회를 베풀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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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는 1975년부터 1977년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그리고 연못터에서 다량의 유물을 발굴되었다. 발굴되어 출토된 것들은 모두 경주국립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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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곳의 이름은 월지라고 하여 월성의 연못이라는 이름이었으나, 폐허가 된 조선시대때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어 기러기 안(雁), 오리 압(鴨)을 써서 안압지라 불렀다. 안압지라는 말은 조선시대부터 사용하던 이곳 지명이다.

안압지를 나와서 남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수학여행때 단골 코스인 경주국립박물관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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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처음 가면 박물관을 들러볼 것을 꼭 권하고 싶다. 이곳에 가면 신라와 경주에 대한 많은 것을 한꺼번에 알 수 있다. 사실 박물관을 먼저 찾아본 다음에 유적지를 찾아보는 것이 신라와 경주를 이해하는데 더 빠른 도움을 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경주박물관을 자주 방문했었기 때문에, 이번엔 들르지 않고 입구까지만 가 보았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동양 최대의 사찰이었던 황룡사가 있던 자리(터)를 찾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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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서 황룡사터를 찾아 나서는 길은 편도 1차선의 조그만 국도를 따라 걸어가야 한다. 양쪽으로 모를 심은 논들이 보이고 가는 길 중간 부분쯤엔 철로도 나 있다. 경주와 포항을 잇는 철도인데, 새마을호와 무궁화호가 다니고 있다.

거의 끝자락인 북쪽으로 길을 걷다보면 오른쪽에 넓은 터가 남아 있고 중간쯤에 가건물들이 서 있는 지역을 만나게 되는데, 여기가 바로 황룡사지이다. 가건물들은 복원작업을 하던 사무실 같아 보인다.

황룡사지는 진흥왕때 궁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나서 이를 사찰로 바꾸어 짓게 된 것이 황룡사이다. 진흥왕때 시작해서 진지왕, 진평왕, 선덕여왕까지 4대가 지나서야 완공된 대형 사찰이었다. 터만 2만여평이 넘는 대불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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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백제의 기술자인 아비지가 세운 황룡사 9층 목탑은 선덕여왕 12년인 643년에 자장율사의 요청으로 건조되었으며, 아홉개의 층은 신라 변방 국가의 숫자를 뜻하며, 탑을 세워 타국의 침범을 막으려는 의도로 세워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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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238년 고려 고종 25년에 몽골의 침입으로 탑을 포함한 황룡사 가람 천체가 불에 타서 소실되었다. 귀중한 우리의 역사가 사라지고 그 터만 남아 있는 곳이다. 금당자리와 목탑자리 등의 기초석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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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보문단지 근처 경주엑스포 자리에 만들고 있는 경주타워의 음각이 바로 황룡사 9측 목탑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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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방향으로 가다보면 우물터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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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지 조감도이다. 얼마나 큰 규모의 사찰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다.

황룡사지를 가로질러 북쪽에 위치한 분황사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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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는 신라 27대 선덕여왕 3년에 건립된 사찰로, 위대한 고승인 원효대사와 자장율사가 계셨던 곳이다. 분황사가 먼저 세워지고 황룡사가 나중에 지어졌다. 지금은 소실된 분황사 천수대비 관음보살 그림은 영험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고 한다.

분황사에는 유명한 석탑이 하나 있는데, 바로 모전석탑(국보 30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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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모전석탑은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신라 선덕여왕 3년에 벽돌모양으로 쌓아 올린 탑이다. 모전석탑이라는 뜻은 '벽돌탑을 모방한 석탑'이다. 특히, 1층 몸체돌 사방에는 쌍여닫이 돌문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감실이 있고, 감실 양쪽으로 불법(佛法)을 지키는 인왕상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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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둘래 기단에는 네 마리의 석사자를 배치해 두었다.

탑 뒤쪽으로는 당시 만들어진 우물인 팔각 모양의 석정이 있다. 이 석정은 호국용(龍)에 대한 전설이 서려있는 우물이다. 호국용변어정이라고도 불린다. 호국용이 물고기로 변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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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 뜰에는 사리탑이 하나 존재하는데, 이 절에서 태어나서 살아있을 때 치아에서 백옥의 사리가 나온 대원심 보살의 사리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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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때 제작된 약사여래입상을 모시고 있는 금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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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를 나와서 잠시 고민을 했다. 경주 시내권 관광은 여기서 끝이 나는데, 시간이 좀 남아서 오릉과 나정이 있는 남산쪽으로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오릉과 나정 쪽은 남산의 입구쪽이서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일단 경주에 왔으니 걸어가보자는 생각으로 오릉까지 걸어갔다. 집에 돌아올때 알았지만, 이때 무리해서 양쪽 발에 물집이 생겼다. 걷기도 많이 걸었다. 결정적인 것이 오릉 방문 때문이었다.

가는 길에 경주빵과 보리빵이 있는 가게들을 지나갔다. 한때 황남빵이라고 유명했는데, 어느새 황남빵이라는 말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게 알고보니 황남빵의 상표권 문제로 인해 한개의 가게만이 '황남빵'이라는 상표를 사용하고 나머지는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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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이를 '경주빵'이라는 이름으로 판매하는 가게들이 눈에 띄었다. 또한 보리로 만든 경주 '보리빵'을 만들어 파는 가게도 많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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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고속버스를 타고 올 때도 몇번 목격했지만, 몇 몇 논에 보리가 자라는 것을 봤다. 왜 보리를 키울까라고 생각했는데, 그 의문이 여기서 풀렸다. 보리를 재료로 빵을 만드는 것이었다. 근데, 양에 비해서는 좀 비싸 보였다. 20개 정도에 8천원을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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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는 높은 건물을 세우거나 현대식의 건물을 짓는데 제한이 있다. 온 시내가 모두 유적지이므로 도시 경관 자체를 해칠 수 있거니와 고도 신라 고풍의 느낌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이렇게 교회도 한옥 형태로 짓게 된다. 이색적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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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에 큰 도움이 된 경주길라잡이 책자와 휴대용 네비게이션이다. 책자를 통해 갈 곳과 유적의 설명을 확인하고 가끔 방향감각이 사라지면 휴대용 네비게이션으로 확인했다.

오릉으로 가는 길에 좋지 못한 모습을 하나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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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릉 숭덕전 정문에 불법주차한 차량이다. 아마도 주차비를 아끼기 위해 이렇게 주차한 모양인데,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여기에 차량을 자주 주차하니까 기둥엔 주차금지라고 종이에 써 붙여놨으나, 아랑곳하지않고 차를 주차해 두었다. 차량 앞범퍼는 대문에 거의 닿을 듯하게 가까이 붙여놨다.

그리고 숭덕전이라고 쓰인 지주석에는 낙서가 잔뜩 적혀있다. 학생들 낙서인 것으로 보이는데, 참으로 한심스럽다. 최소한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보였다. 이 지주석이 문화재는 아니지만, 다른 곳의 유적지 건물에도 낙서들이 좀 보였다.

오릉은 신라시조이자 박(朴)씨 성씨의 시조인 혁거세왕의 능이 위치한 곳이다. 오릉안에는 숭덕전이라고 하여 박혁거세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 있다. 세종 11년에 지어졌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었고 다시 선조 33년에 재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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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되면 이곳에는 박씨 종친의 제사 행사가 열린다. 전에 나도 참석한 적이 있어서 낯선 곳은 아니다. 여기와 나정에서 차례로 제를 지내고 의례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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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덕전 뒷편에는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왕비가 태어난 알영정이 있다. 박혁거세가 알에서 나온 날 이곳 알영정에서는 계룡이 나타났는데, 계룡의 왼쪽 옆구리에서 여자 아이가 낳는데, 이 여자 아이가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이다. 알영정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름을 알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터만 남아 있고 이곳에 돌막이 3개로 덮어 두었으며, 비석을 세워 표시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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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릉은 크고 작은 능 5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두개의 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삼국유사에 나와있는데, 박혁거세와 알영왕비의 시신을 합장하려 하자, 큰 뱀이 방해를 하여 오체(五體)를 각각 나누어 장사를 지내서 오릉이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며, 그런 이유로 오릉을 사릉(蛇陵)이라고도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박혁거세왕, 알영왕비, 남해왕, 유리왕, 파사왕과 같은 박씨 왕가의 초기 능묘라고 적혀있다. 신라 초기 왕들이 박씨 성을 가졌고 나머지는 대부분 석씨와 김씨들이 이어갔기에 박씨 왕들만 따로 모아둔 것일 수도 있다는 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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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쨋든, 박혁거세왕의 능은 맞기 때문에 박씨 종친에서는 이 곳에 시설을 하여 제를 지내고 있다. 다른 왕릉에 비해 넓고 깨끗하게 유지되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위 사진은 제사를 지내기 위한 시설의 문인 '숭의문'이다. 그 뒤로 보이는 것이 사당이다. 사당 뒤로 오릉이 위치해 있다.

오릉의 한쪽에는 연못이 있는데, 토란이 많이 자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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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릉에서 나오자 시간이 제법 늦었다. 걸어온 시간 때문에 더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서, 근처 나정과 포석정에는 들러보지 못했다.

하루 나들이로 경주의 모든 유적지를 살펴보는데는 한계가 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 하루 나들이로서 경주 시내권 관광은 괜찮다.

다음번엔 남산권이나 불국사권으로 가보는 것도 괜찮겠다.

경주 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다음이 웹사이틀 방문하여 준비하고 출발하는 것이 좋다.

경주문화예술관광 홈페이지 : http://www.gyeongju.travel

각종 관광 정보와 지도, 이벤트, 유적지 입장권 가격 등의 정보 등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번 나들이에 몇몇 아쉬운 점도 있었는데, 여러 유료 유적지를 들를때마다 일일히 500원에서 1,300원까지 비용을 내고 들어갔다. 많은 비용은 아니었지만, 1일 패스 등을 만들어 판매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외 관광지에는 보편화되어 있는데, 경주는 그런 시스템이 없다.

또, 여전히 불친절하게 대하는 일부 상인들 때문에 관광객들이 다소 황당해 하는 것도 목격했다. 외국인들의 경우 특별한 가이드가 없으면 관광이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중의 하나라는 경주에는 외국인들을 위한 특별한 배려가 보이지 않았다. 관광안내소도 몇 개 되지 않았고, 그나마 영어나 일본어 중국어로 된 책자도 몇 부 없거나 아예 없는 것도 있었다. 여행수지 적자는 바로 이런 작은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직접 겪어보지는 않았으나, 신용카드 결제를 거부하거나 현금만 요구하는 이용시설이나 숙박시설이 있다는 점도 문제라는 지적이 많이 있다. 경주문화예술관광 홈페이지 커뮤니티란에 가보면 대부분 경주관광에 대한 불평 투성이다. 경주시가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경주 시내를 걷다보면 택시들의 경적소리를 자주 듣는데, 행인들에게 택시를 탈 의향이 있는지를 물어보는 방법이므로 놀랄 필요없다. 의례 자동차 경적 소리가 짧게 들리면 택시가 근처에 있다는 것만 알아두면 된다.

오전 11시에 도착해서 6시에 출발했으니 7시간을 경주에서 보냈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도시 경주는 언제 가도 푸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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