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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차를 운전한 것은 1995년 여름이었다. 당시 복학생이었던 나는 운전면허는 필수라는 주위의 의견에 따라 집근처 운전학원에서 배워 그해 면허시험에 합격했다.
실제 연습은 아버지의 차로 했었다. 차가 움직일때의 두려움을 이겨내면 차를 모는 기쁨을 알게 된다. 브레이크에 의존한 질주가 시작된 것이었다. 운전은 차로부터의 두려움이 끝나는 순간 이루어진다.
그리고 같은 해 내 인생의 첫 차인 91년식 '프라이드 DM' 중고차를 사게 되었다. 당시 난 학생이긴 했지만 벤처기업에 참여하여 직장과 학교를 왔다 갔다 하게 되었다. 그래서 학교와 직장 사이를 오고가는 교통 수단으로 차를 구입하게 되었다.
당시는 IMF 체제 전이어서 원화가치가 상당히 셌다. 그래서 1리터에 700원 정도하는 금액에 휘발유를 넣을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물론 싸게 기름을 넣을 수 있는 시기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지만, 프라이드를 몰면서부터 본격적인 나의 Car Life가 시작되었다.
차를 소유하게 되면서 여러가지 비용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늦게 알게 되었다. 차는 그저 기름(휘발유)만 넣으면 동작하는 기계가 아니었다. 때가 되면 엔진오일도 갈아줘야 하고, 타이어도 점검하고, 엔진쪽의 부속품들도 자주 자주 교환해 주어야 했다. 특히 중고차는 부품교체가 잦았다.
당시 운전경력으로 봐서는 아주 대선배인 아버지께서는 차를 잘 관리하는 요령 중의 하나는 바로 카센터를 잘 정해놓고 다니는 것이라고 충고를 해 주셨다.
카센터는 사람으로 치면 병원에 해당한다. 거기에 정비사는 의사이고 의사의 처방에 따라 차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니 이곳 저곳 병원을 자주 다니는 것보다는 지정된 병원에 주치의처럼 차의 아픈 곳을 알고 있는 의사가 아무래도 낫다.
때가 되면 어떤 부품을 갈아야 하고 어떤 것을 점검해야 하는지를 아는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이 있다면 어딜 찾아 가겠는가?
그래서 나와 내 첫차 프라이드의 주치의는 바로 경북대 북문쪽에 위치한 '광은카서비스'였다. 길가에 위치해 있지만 허름하게 지어진 오래된 터에 그리 넓지 않은 정비마당을 지닌 곳이었다.
그곳의 사장이자 정비사인 '광은'씨는 우연하게도 나와 나이가 같은 동갑내기다. 이런 공통점으로 인해 나와 서비스센터 사장은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차를 정비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가끔 놀러도 가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내가 대구를 떠나던 해인 1999년에 새차를 사고나서 오일교환을 한번하고 나와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갔다. 그리고 서울에서 지금까지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었던 광은카서비스는 가끔 차가 고장을 일으킬때마다 그리운 존재였다. 늘 찾아가면 문제점을 바로 알아내고 가장 저렴한 방법으로 차를 고쳤다.
당시 학생신분이어서 돈이 많이 들어가는 정비가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광은씨는 내게 중고부품을 권해 주었고, 문제없이 차를 유지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나뿐만 아니라 주위에 대학생들이 단골로 잘 찾을만큼 광은씨의 정비실력과 저렴한 비용은 인기가 있었다.
대구를 떠난지 벌써 9년이 다 되어가는 오늘 다시 광은카서비스를 찾았다. 가끔 이 동네 거리를 지나가면서 아직도 잘 운영하고 있는 카서비스센터를 보며 미소짓곤 했었다. 아직도 차와 씨름하는 모습을 먼 발치에서 보고 들를까 하는 마음을 억누르기도 했었다.
차없이 불쑥 찾아가기가 참 어색했다. 그도 그럴것이 벌써 세월이 훌쩍 넘어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기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내 차는 참으로 서러움을 많이 받았다. 새차였기 때문에 특별히 관리를 하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광은카서비스처럼 내 차를 잘 봐주는 카센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서울에 카센터가 얼마나 많은지 잘 알지만, 내 차의 주치의는 금방 찾을 수 없었다. 이상하게 동네 정비소에 찾아가면 바가지 씌우려는 느낌을 받았고, 가끔은 쓸데없는 부품을 갈도록 강요하는 적도 있었고(물론 심정상 느낀 것이지 정비사의 말이 맞았을 것이다), 불친절함도 한몫을 해서 자주 가는 정비소가 없었다. 하긴, 차가 정비소를 자주 찾아가는 것도 문제가 있다.
내 차의 이력을 그나마 관리하는 곳은 그린카서비스(현대차서비스)였다. 그러나, 공임이 비쌌고, 빡빡한 서울살이에서 차로 들어가는 돈은 아주 컸다. 이런 저런 복합적인 요소가 섞이게 되자 정비소를 찾는 경우는 연중행사가 되었다.
서울에 있으면 이곳 저곳 차를 타고 다닐 일이 별로 없기에, 차는 집이나 사무실 주차장에서 노는 날이 점점 많아졌고, 차를 관리하는 것에 소홀해지기 시작했다.
8만 킬로미터가 넘어서면서 차령도 장년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타이밍벨트를 갈면서 이곳저곳 손을 보면서 30만원 가까운 거금을 들였던 것이 2004년이었다. 그때 당시 서비스센터로부터 차를 너무 관리하지 않는다는 핀잔을 들었다.
내 차를 잘 아는 사람이 없다는 핑계로 방치했던 결과였다. 그리고 나서도 차가 이상이 생길때마다 사후약방문식으로 그때 그때 고쳤다. 물론 비용은 말할나위없이 시간이 흐를수록 많이 나왔다.
차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잘 알지만, 차 수리비는 대부분 부품값보다는 부품을 가는 공임이 더 비싸다. 특히 엔진 부분에 손을 델 경우는 공임이 많이 올라간다.
어느순간부터 차는 대형할인마트에 가면 잠깐 점검하는 형태로 바뀌어서 볼 일이 있으면 할인점 정비소에 맡기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뭘 바꾸라고 하면 군말없이 바꾸곤 했었다.
그 일도 오랫동안 하지 않던(한동안 차를 잘 쓰지 않았더랬다) 차를 어제 낮에 할인점 정비소로 가져갔더니, 한꺼번에 여러곳의 정비를 해야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얼추 비용만 50만원 가까이 들어가는 대대적인 정비 예고였다.
이때 절실히 광은카서비스가 생각났다. 이 친구에게 맡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오늘 대구로의 출근은 자가용으로 했다. 덕분에 서울에서 새벽 4시에 출발해서 대구로 왔다.
근 8년 넘게 찾지 못한 정비소에 도착하자 너무나 반가운 얼굴이라며 반갑게 맞이하는 광은씨를 보면서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뿐만 아니라 내 차도 호강을 했다. 이곳저곳을 살펴보고는 진단이 바로 나왔다.
원래 들어야할 돈이 50만원 정도였다면, 더 쓸 수 있는 것은 더 써보라는 권고를 받고, 당장 바꾸어야 할 부분만 처리해서 15만원이 들었다. 금액이 50만원에서 15만원이 줄어든 것도 기뻤지만, 오랫만에 믿을 수 있는 정비소를 찾았다는 기쁨이 더 컸다.
오래전에 비해 서로 살이 오른 모습을 보며 희죽거리며 웃기도 했고, 정비하는 동안 가족 이야기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정비소에는 돈이 들어가서 늘 웃음이 나지 않은 곳이었는데, 이상하게 이곳만 오면 웃음이 나왔다.
나뿐만 아니라 내 차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 준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까지 상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후 약 1시간의 차량 정비를 마치고 내 마음만큼 가뿐해진 차를 가지고 돌아오면서 잊었던 친구를 다시 만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기름밥먹고 사는, 차밖에 모른다는 동갑내기 오광은씨의 큰 아이는 벌써 13살이란다. 또 둘째 사내아이는 당시 엄마품에 안겨 사무실에서 우유를 먹고 있었는데, 벌써 그 아이가 저렇게 커서 학교를 다닌다니...
마우스를 올려보니 주절주절 많이도 썼다. 광은카서비스에 대해 그렇게 할 말이 많았나보다. 깨끗하게 목욕한 기분처럼 잘 정비된 차를 타고 내일은 경주를 가볼까 한다.
광은씨 고마워요, 그리고 오랫만에 봐서 아주 반가웠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