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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eling(체인질링)은 '바꿔친 아이'라는 뜻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싱글맘인 주인공이 아들의 실종사건으로 겪게되는 권력의 부패를 다룬 내용이다.
주인공 크리스틴역의 안젤리나 졸리의 연기가 인상적이라는 평가들이 주를 이룬다. 또한 이 영화의 감독이 명배우이자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점은 영화의 무게를 더하는 또 다른 축이기도 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휴머니즘을 강조하는 영화를 주로 만든다.
영화는 평범해 보이는 아이의 실종사건에서 비롯된다. 자식을 낳아서 키워보면 아이의 실종이 부모에게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더군다나 싱글맘으로 아이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주인공의 상황이라면 그 기분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한마디로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다.
실종된지 5개월이 지나 경찰이 찾아온 아이는 주인공의 아이가 아니었다. 이미 이때부터 당시 LA 경찰의 부패상을 엿볼 수 있다.(이 영화는 실제사건을 영화화한 것이다) 치안에 대한 시민들의 불안감을 해소할 길이 없었던 경찰은 억지로 아이를 찾아주는 시늉을 한다.
5개월만에 찾은 아이를 자신이 낳은 아이인지 아닌지를 구분 못할 엄마가 있을까? 이런 상식적인 질문은 경찰에게 통하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주인공을 정신병 환자로 몰아세운다. 그리고 이때부터 권력에 복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함을 떨칠 수 없을 것이다. 영화 초기에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오히려 가슴을 더 짓누르게 한다. 막연한 권력으로부터의 공포가 아닌, 실제 나와 같이 이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이 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포가 현실로 다가온다.
영화는 공공의 안전을 위해 시민으로부터 부여받은 절대권력이 부패하면 그 피해가 결국 시민에게 돌아간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우쳐주고 있다. 자신에게 엄청난 충격과 피해를 입히는 국가권력이 (시민)자신이 권한을 부여한 것이라는 점에서 언론의 역할과 사회의 감시 기능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부각시킨다.
영화에는 부패한 경찰의 비리를 파헤치고 주인공을 돕는 두명의 조연이 등장한다. 존 말코비치가 맡은 구스타브 브리그랩 목사와 레스터 야바라 형사(마이클 켈리)가 사건을 풀어나가는 핵심 역할을 한다.
한명은 종교인이자 언론인(라디오 방송 운영)으로 한명은 LA 경찰청의 형사로서 책임감과 양심으로 권력의 부패에 맞서고,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역할로 나온다.
무소불위의 권력은 누구로부터 나오는가라는 질문을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넌지시 던진다. 결국 그 권력을 쥐어준 시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그 권력행사의 정당성 역시 시민이 판단한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잘못된 권력의 남용은 누군가가 지적하고 바로잡지 않으면 결국은 권력을 쥐어준 시민을 권력안에서 길들이려는데 사용하게 된다. 잘못된 권력은 결국 욕심을 만들어내고, 도둑을 잡아야할 개가 주인을 물어뜯는다.
크리스틴의 일을 남의 일처럼 생각하지 않고, 시민의 입장에서 그리고 잘못된 권력을 향해 일침을 놓고 바른 말을 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다. 하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언론은 브리그랩 목사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LA 경찰청의 발표를 아무런 이의없이 카메라 플래쉬와 함께 그대로 기사화만 하는 언론인이 다수 등장한다. 비판과 감시의 역할이라는 책무의 관점에서 봤을때 과연 어떤 것이 언론인지를 감독은 되묻고 있다.
또 한사람의 영웅은 야바라 형사다. 그는 경찰로서의 책무를 다하여 결국 범인을 찾아내고 주인공의 한을 풀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만일 그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사건은 영원히 묻혔을 것이다.
한사람의 억울함이라도 풀어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경찰이라면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바로 시민에 대한 의무이며 경찰이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야바라 형사는 LA 경찰청의 형사이다. 영화에서도 드러나지만, LA경찰청의 경찰조직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의 경찰관료들의 잘못된 조직운영이 어떻게 조직을 파괴시키고 무능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 초반부에 주인공이 아이의 실종을 신고하면서 보이는 태도에서 이미 당시의 경찰조직의 문제점을 꼬집고 있다. 아이를 잃고 불안에 떠는 부모에게 (전화를 건) 지금은 근무시간이 끝났으니 다음날 아침에 수사를 하겠다는 전화통화가 그것이다.
영화 자체로만 보면 경찰청장과 존스반장의 권력욕과 무책임함으로 인해 경찰전체의 신뢰에 큰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존스반장 역시 경찰청장의 지시에 따라 사건을 은폐하고 무마하려는 시도를 한다. 결국 한집단의 우두머리에 요구되는 도덕성과 권력욕에의 집착이 조직을 운영하는데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영화일뿐이다, 극단적인 면만을 부각시킨다'라며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 자체를 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언론과 권력이 어떠해야 하는지만큼은 동의할 것이다.
무조건적인 반대도 충분히 문제가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시민, 국민을 대신한다는 생각으로 권력에 맞서고, 감시하고 비판하는 역할이 바로 '언론'의 정도이며, 권력의 따스함에 젖어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경찰로 대변되는 권력 역시, 누구를 위한 권력인지 그리고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를 잘 알고 행사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결국 그들의 권력은 시민과 국민의 힘을 대신하는 것일뿐 그이상도 그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나는 이 영화 한편으로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로 다시 보게된 계기가 되었다. 때론 몇년간의 논쟁보다 영화 한편이 전하는 메시지가 강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칸영화제는 5월에 열릴 시상식에 참석못할 그를 위해 2월 25일 칸영화제 명예황금종려상을 수여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 경찰, 검찰이 이 영화를 꼭 봤으면 좋겠다.
(영화내용에 나오는 이미지들은 모두 네이버 영화에서 가져왔습니다)
주인공 크리스틴역의 안젤리나 졸리의 연기가 인상적이라는 평가들이 주를 이룬다. 또한 이 영화의 감독이 명배우이자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점은 영화의 무게를 더하는 또 다른 축이기도 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휴머니즘을 강조하는 영화를 주로 만든다.
영화는 평범해 보이는 아이의 실종사건에서 비롯된다. 자식을 낳아서 키워보면 아이의 실종이 부모에게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더군다나 싱글맘으로 아이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주인공의 상황이라면 그 기분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한마디로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다.
실종된지 5개월이 지나 경찰이 찾아온 아이는 주인공의 아이가 아니었다. 이미 이때부터 당시 LA 경찰의 부패상을 엿볼 수 있다.(이 영화는 실제사건을 영화화한 것이다) 치안에 대한 시민들의 불안감을 해소할 길이 없었던 경찰은 억지로 아이를 찾아주는 시늉을 한다.
5개월만에 찾은 아이를 자신이 낳은 아이인지 아닌지를 구분 못할 엄마가 있을까? 이런 상식적인 질문은 경찰에게 통하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주인공을 정신병 환자로 몰아세운다. 그리고 이때부터 권력에 복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함을 떨칠 수 없을 것이다. 영화 초기에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오히려 가슴을 더 짓누르게 한다. 막연한 권력으로부터의 공포가 아닌, 실제 나와 같이 이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이 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포가 현실로 다가온다.
영화는 공공의 안전을 위해 시민으로부터 부여받은 절대권력이 부패하면 그 피해가 결국 시민에게 돌아간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우쳐주고 있다. 자신에게 엄청난 충격과 피해를 입히는 국가권력이 (시민)자신이 권한을 부여한 것이라는 점에서 언론의 역할과 사회의 감시 기능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부각시킨다.
영화에는 부패한 경찰의 비리를 파헤치고 주인공을 돕는 두명의 조연이 등장한다. 존 말코비치가 맡은 구스타브 브리그랩 목사와 레스터 야바라 형사(마이클 켈리)가 사건을 풀어나가는 핵심 역할을 한다.
한명은 종교인이자 언론인(라디오 방송 운영)으로 한명은 LA 경찰청의 형사로서 책임감과 양심으로 권력의 부패에 맞서고,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역할로 나온다.
무소불위의 권력은 누구로부터 나오는가라는 질문을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넌지시 던진다. 결국 그 권력을 쥐어준 시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그 권력행사의 정당성 역시 시민이 판단한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잘못된 권력의 남용은 누군가가 지적하고 바로잡지 않으면 결국은 권력을 쥐어준 시민을 권력안에서 길들이려는데 사용하게 된다. 잘못된 권력은 결국 욕심을 만들어내고, 도둑을 잡아야할 개가 주인을 물어뜯는다.
크리스틴의 일을 남의 일처럼 생각하지 않고, 시민의 입장에서 그리고 잘못된 권력을 향해 일침을 놓고 바른 말을 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다. 하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언론은 브리그랩 목사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LA 경찰청의 발표를 아무런 이의없이 카메라 플래쉬와 함께 그대로 기사화만 하는 언론인이 다수 등장한다. 비판과 감시의 역할이라는 책무의 관점에서 봤을때 과연 어떤 것이 언론인지를 감독은 되묻고 있다.
또 한사람의 영웅은 야바라 형사다. 그는 경찰로서의 책무를 다하여 결국 범인을 찾아내고 주인공의 한을 풀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만일 그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사건은 영원히 묻혔을 것이다.
한사람의 억울함이라도 풀어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경찰이라면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바로 시민에 대한 의무이며 경찰이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야바라 형사는 LA 경찰청의 형사이다. 영화에서도 드러나지만, LA경찰청의 경찰조직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의 경찰관료들의 잘못된 조직운영이 어떻게 조직을 파괴시키고 무능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 초반부에 주인공이 아이의 실종을 신고하면서 보이는 태도에서 이미 당시의 경찰조직의 문제점을 꼬집고 있다. 아이를 잃고 불안에 떠는 부모에게 (전화를 건) 지금은 근무시간이 끝났으니 다음날 아침에 수사를 하겠다는 전화통화가 그것이다.
영화 자체로만 보면 경찰청장과 존스반장의 권력욕과 무책임함으로 인해 경찰전체의 신뢰에 큰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존스반장 역시 경찰청장의 지시에 따라 사건을 은폐하고 무마하려는 시도를 한다. 결국 한집단의 우두머리에 요구되는 도덕성과 권력욕에의 집착이 조직을 운영하는데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영화일뿐이다, 극단적인 면만을 부각시킨다'라며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 자체를 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언론과 권력이 어떠해야 하는지만큼은 동의할 것이다.
무조건적인 반대도 충분히 문제가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시민, 국민을 대신한다는 생각으로 권력에 맞서고, 감시하고 비판하는 역할이 바로 '언론'의 정도이며, 권력의 따스함에 젖어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경찰로 대변되는 권력 역시, 누구를 위한 권력인지 그리고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를 잘 알고 행사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결국 그들의 권력은 시민과 국민의 힘을 대신하는 것일뿐 그이상도 그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나는 이 영화 한편으로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로 다시 보게된 계기가 되었다. 때론 몇년간의 논쟁보다 영화 한편이 전하는 메시지가 강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칸영화제는 5월에 열릴 시상식에 참석못할 그를 위해 2월 25일 칸영화제 명예황금종려상을 수여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 경찰, 검찰이 이 영화를 꼭 봤으면 좋겠다.
(영화내용에 나오는 이미지들은 모두 네이버 영화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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