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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박사가 MBC 황금어장의 무릎팍도사 촬영을 마쳤다고 들은지가 꽤 되었다. 그 뒤로 매주 수요일 늦은 밤만 되면 출연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이내 잠을 자러 들어갔었다. 금주의 출연자를 알아낼 수 없기에 그 시간이 되어서 확인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어제도 드라마가 끝나고, 11시 10분이 넘어서야 출연자가 안철수 박사라는 것을 알고 끝까지 시청을 했다. 1시간을 훌쩍 넘긴 방송시간때문에 뒤쪽의 라디오스타는 다음주로 방송을 미뤘다. 사실 1시간동안 TV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1989년 대학 1학년에 입학하면서 대학입학선물로 받은 금성사의 마이티88이라는 XT 컴퓨터와 함께 시작된 나의 컴퓨터 입문기에 잊을 수 없는 것이 컴퓨터 바이러스였다. 그때부터 안철수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다.

패미콤 같은 테이프를 이용한 가정용 게임기 기능의 컴퓨터들이 나와 있던 때라 요즘 가정에서 사용하는 x86 계열의 범용컴퓨터는 고가의 사치품에 가까웠다. 모노크롬 모니터에 5.25인치 2D D디스크 드라이브 2개만 달린 컴퓨터였지만, 당시 공학도였던 내게는 정말 중요한 물건이었다.

대학에 입학하여 수업을 마치면 거의 매일 들렀던 곳이 공대 컴퓨터실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전자계산실습실'이라는 이름으로 XT 컴퓨터들이 모노크롬모니터와 함께 30여대 설치되어 있던 실습실이었다.

학교 기숙사로 돌아가면 선물받은 XT 컴퓨터가 있었지만, 성능이 좀 더 좋고 다른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었던 실습실이 좋아서 거의 매일 수업후에는 실습실에서 살았다.

디스켓으로 DOS 부팅하여 깜빡이는 프람프터에서 DOS 명령어들과 포트란 77 이라는 에디터겸 컴파일러를 띄우고 수업시간에 배운 랭귀지를 실습하거나, 서울대생들이 만들었다는 아래한글 0.9버전을 사용하여 워드프로세서 실습하는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나와 비슷한 생각으로 공대 실습실을 찾은 학생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5.25인치 검은색 플로피디스켓과 책을 들고 들어와서 컴퓨터를 사용했었다. 거의 매일 들르다보니 서로 알게되어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기대하는 것은 컴퓨터 프로그램 교류였다. 당시 PC통신에서 다운로드 받은 PC용 프로그램들을 디스켓에 담아와서 서로 복사하여 나눠주고 사용하던 일들이 실습실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프로그램 하나하나가 귀하던 시절이어서 실습실은 나름대로 컴퓨터 분야의 얼리어뎁터들이 모인 공간이었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가져오면 여러사람들과 복사하여 사용해보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컴퓨터 프로그램 복제에 대해 제한이 거의 없었고, 개인들이 만든 것들이 많아서 큰 문제없이 서로 교류했었다.

그런 일들이 잦아진 가운데, 언제부터인가 프로그램을 동작시키면 디스켓의 볼륨네임을 바꾸고 메모리가 약간 줄어드는 현상이 발생했다. 특히 같은 프로그램을 복제한 사람들 사이에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것이 바로 파키스탄에서 만들어졌다는 (C) Brain (브레인) 바이러스였다. 브레인 바이러스는 부트바이러스로 부팅할 때 메인메모리에 상주했다가 옮겨가는 방식이었다. 데이터를 파괴하는 등의 악성은 아니었지만, 부팅시간이나 컴퓨터 동작을 느리게 만들어서 골탕을 먹이는 바이러스였다.

이런 증상이 있고 나서 며칠 뒤에 실습실에 자주 오던 한 학생이 백신프로그램을 가지고 왔다. 그 프로그램이 바로 안철수 박사가 만들어서 무료로 배포했던 백신(Vaccine)이었다. 당시에는 V3가 아니라 'Vaccine'이라는 이름이었다.

실습실에서 구한 백신으로 브레인 바이러스를 없앨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여러가지 바이러스들이 PC통신망을 통해 다운로드받은 프로그램들에 숨어서 전파되는 일들이 많았고, 그때마다 백신은 업데이트되어 나왔었다. 당시에 백신 제작자는 의대에 다니는 사람이고 무상으로 프로그램을 배포하고 있다는 정도의 소문만 있었다.

어떤 이는 컴퓨터 바이러스가 생물학적 바이러스와의 차이점을 이해하지 못해서 디스켓에 모기약같은 스프레이를 뿌리는 일도 있었다. 실제 실습실에서 목격한 사례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바이러스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었다. 물론 그렇게 처리한 디스켓은 작동하지 않고 폐기처분해야 했다.

당시 아래한글 0.9 버전과 Vaccine은 실습실을 찾는 학생들의 머스트해브(Must Have) 품목이었다. 그리고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복제를 해주는 1순위 프로그램이었다. 나중에 Vaccine은 Vaccine II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버전들이 V1과 V2 버전이었다. 그 뒤에 V3가 나왔었다. 1995년 V3가 상용이 되면서 V3+로 이름을 바꾸었다.

브레인 바이러스 이후에도 예루살렘 바이러스, LBC 바이러스, 다크어벤저 바이러스 등 계속해서 컴퓨터 바이러스들이 나타났다. 이들 대부분은 PC통신에서 다운받은 프로그램에 숨겨져서 아는 사람들 사이의 디스켓복제로 전파되었다.


컴퓨터 바이러스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군제대후 복학했을 당시에는 백신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백신(Vaccine)은 무료라는 인식이 당시에 강하게 남아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유료로 판매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마도 1995년 경이라고 알고 있는데 몇년간 무료로 잘 썼던 내게는 서운하게 느껴졌었다.

더 많은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이를 일일히 대응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바이러스 수집과 대응방안 등이 필요하기에 유료화는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백신의 유료화는 거부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지금은 보안회사라는 개념으로 정립이 되었지만, 당시엔 그저 백신을 만들어서 기업이나 개인에게 판매하는 정도의 단순 소프트웨어 회사 정도로 생각했었다. 어떨 때는 백신을 팔기위해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회사는 아닐까 의심했었던 적도 있었다.

나중에 안철수 박사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런 불신감은 남아 있지 않았다. 초창기 안철수 연구소에 합류했던 지인이 있어서 많은 얘기를 들었고, 나중에 그의 저서도 읽으면서 존경하게 되었다.

자신이 CEO가 될 줄은 몰랐다고 했지만, 결국 한국의 대표적인 소프트웨어 회사의 대표가 되었고, 어느날 갑자기 그 자리를 다른 이에게 넘겨주고 공부하러 떠난 사람이 안철수 박사였다.

그의 인간적인 면은 여러 사례에서 많이 들었다. 절대 화내지 않는 분이라는 이야기에 반신반의했지만 실제 그런 분이었다는 것을 늘 대단하게 생각했었다.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 중에는 화를 내는 것보다 대화로 푸는 설득이 더 효과적이라는 말이 아직도 인상 깊다.  

1시간이 넘는 안철수 박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미 많이 알고 있었다는 친숙함도 있었지만, 새삼 대단한 분이라는 느낌을 나만 받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안철수 Vaccine'이 세상에 나온지 벌써 20년이나 되었단 말인가? 안철수라는 이름과 Vaccine 프로그램은 나의 컴퓨터 라이프 입문과 대학 초년생 시절 잊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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