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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이야기

할아버지와 막걸리

킬크 2006. 11. 26. 12:03

난 초등학교 4학년때까지 조부모와 함께 농촌에서 살았었다.

멀리 화물운송을 다니시는 아버지와 공장일을 하시는 어머니와 함께 지금은 많이 개발된 시골 마을에 살았다. 할아버지댁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낙동강이 바로 뒤에 있고, 작은 야산들로 둘러쌓여 있으며, 앞에는 논들이 펼쳐진 그런 곳에 위치해 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난 집안의 장손으로서 모든 식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아버지가 장남이어서 집안의 아이는 나와 동생들 뿐이었는데 특히 장남인 나는 조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지금은 돌아가신 내 할아버지는 술을 아주 좋아하셨다. 그때 술이라 하면 대부분 막걸리나 소주였는데, 주로 막걸리를 많이 드셨다. 농촌이 대부분 그렇지만 힘든 농사일 뒤에 막걸리 한잔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는가. 그때 막걸리는 지금처럼 쌀로 만들지 않았고, 좁쌀이나 수수 등으로 만들었다. 단맛을 내기 위해 사카린을 탔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조부모들께서는 나를 아주 귀여워해 주시기도 했지만, 심부름 역시 거의 내 차지였다. 어느집에 가서 농사기구 빌려오는 일이나(물론 작은 것들), 어느 집에 뭘 갖다 주는 일이며, 자질구레한 일들은 내 몫이었다. 그런 일들 중에 막걸리를 사가지고 오는 일도 아주 많았었다. 동네엔 나만 그런 심부름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 친구들도 동네 형들도 그런 심부름을 자주 했었다.

내가 살았던 동네는 조그만 야산을 두개 넘어 도착할 수 있는 가게에서만 막걸리를 팔았다. 그때는 지금처럼 플라스틱병에 담겨져 판매되는 것이 아니라 주전자를 가지고 가면 담아주는 그런 방식이었다. 더 많은 양을 사가려면 말통이라는 플라스틱통으로 팔긴했지만, 잔치때 사용할 정도로만 사던 기억이 난다.

지금이야 거리가 1Km도 안되는 거리지만 어릴 때는 그 거리가 참으로 멀게만 느껴졌다. 또 낮은 야산을 두개나 넘어야 하기에 무섭기도 하고 그랬었다. 가끔 막걸리 심부름을 하면 사탕도 하나 사먹을 수 있는 돈을 받았기에 늘 힘들고 하기 싫은 심부름은 아니었다.

할머니께서 주시는 빈주전자(양은 주전자)를 가지고 집밖을 나서면서 받은 돈을 꼭 쥐고는 산길을 지나 가게로 갔었다. 그땐 아주 먼 거리라 느꼈기에 가다가 잠시 길가에서 놀기도 하고, 개울가에서 물장난도 하고 그랬었다.

첫번째 야산을 넘고 두번째 야산을 넘을땐 겁이 많이 났다. 그곳엔 이름모를 이들의 무덤이 많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른들로부터 들은 얘기는, 그곳은 한국전쟁 당시 이름모를 병사들의 무덤이었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막걸리를 사는 가게 근처엔 매월 6월 25일만 되면 군인들과 높은 사람들이 와서 행사를 하는 충혼탑이 근처에 있었다. 낙동강전투라고 나중에 배운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곳 중의 한 곳이 그 동네였다.

그래서 이름모를 무덤을 혼자 지나가노라면 대낮이라도 가끔 무서울 때가 있었다. 무덤이 보이는 지역은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었다. 행여 지나가는 행인이 있었을때는 그래도 안심이 되었었다. 그렇게 해서 한 20~30분 걸어가서 도착한 가게에서는 늘 반갑다고 맞아주시는 아저씨가 계셨다. '아니 xx댁 손주 오셨네...' 늘 이렇게 반갑게 맞고서는 이내 내가 가져온 주전자에 막걸리를 담아 주셨다. 가끔 돈도 주지 않았는데 사탕도 한개씩 주시곤 했었다. 거의 주전자 주둥이에 막걸리가 쏟아질 정도로 찰랑찰랑하게 담아 주셨다. '잘 들고 가야 한다'라는 당부도 잊지 않으신다.

빈 주전자를 가지고 갈때야 가볍고 빠른 걸음이 되었지만, 막걸리를 가득담은 주전자는 들고 가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막걸리를 행여 쏟을까 조심조심했었다. 산을 두개나 넘어야 하기에 갈때보다 올때 시간이 훨씬 많이 걸린다. 왕복 1시간은 되니까 그땐 꾀나 먼 거리였다.

대부분 유년시절 나와같은 경험이 있는 분들에게 남은 추억이 있다. 가지고 오던 막걸리의 맛을 보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 인생 최초의 알콜섭취는 아마도 그때였으리라.

찰랑찰랑 넘칠듯 말듯한 주전자를 가지고 가다보면 이게 무슨 맛일까 궁금할 때가 많다. 또 그때가 호기심도 왕성한 나이 아니던가? 이내 입을 주전자 주둥이로 옮겨 살짝 맛을 보았다. 단맛과 신맛이 나고 코를 찌르는 듯한 독기가 느껴진다. 뭐든 첨엔 다 그런 것이다. 그렇게 약간 맛을 보고는 집으로 돌아간다. 어떨때는 돌아가는 길에 길가에 난 풀을 보다가 개울가에 개구리를 보다가 놀다가 들어간 날도 많았었다.

그렇게해서 집에 도착해서 주전자를 할머니께 건내면 고생했다고 할머니께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곤 하셨다. 할아버지께선 '너도 한잔 주랴?'라고 농을 던지기도 하셨다. 물론 난 이미 맛을 본 상태가 대부분이었다.

가끔은 나만 혼자 심부름을 가는 것이 아니라 옆집에 친구와 같이 술을 받으러 가는 경우도 많았다. 참, 그때는 술 사오라는 말보다는 술 받아오라는 말을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럴땐 둘이서 신나게 놀면서 산길을 넘어 가게로 가기도 했었다. 가득 받아온 술을 이젠 둘이서 들고오게 되는데, 둘 다 술 맛을 조금씩 보면 참 재미 있기도 했었다.

언젠가는 그런 일도 있었다. 약간 맛을 봤는데, 술에 취해서 (어리니까 술을 조금만 마셔도 취하는 경우가 생긴다) 할아버지 할머니께 혼난 기억도 있다. 얼굴은 붉어져 있고, 술 사러 보낸 손주 녀석이 약간씩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니 얼마나 당황스러우셨겠나. 아마도 우리 또래들은 그런 경험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때 기억나는 것이 또 하나 있는데, 막걸리도 입맛에 따라 변형시킬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주전자에 막걸리를 담아줄때 종이에 소금같이 싸서 '사카린'을 받아간 기억이 있다. 아마도 나중에 도착하면 할머니는 막걸리 맛을 약간 보시다가 마치 간을 하듯이 사카린을 막걸리에 타는 모습을 목격했었다. 사카린이 단맛을 내는 역할을 했기에 술이 너무 떫거나 하면 넣었었던거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벌써 30년이나 된 이야기다.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이유는 유난히 나를 귀여워해 주셨던 할아버지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에 올라가던 해에 돌아가셨다. 술의 영향이 있었겠지만 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 한동안 계속 매일 '전원일기'를 보시고 싶다고 했던 기억이 선하다. 지금도 산소에 가면 비싼 술대신 막걸리로 제를 지내곤 한다.

어제 처남 내외와 함께 동네 막걸리 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다 문득 할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다. 막걸리 주전자에서 잠시 잊고 살았던 무언가를 다시 찾아냈다. 아마도 그리움이 아니었을까...

보고싶습니다.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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